시인 詩 모음

눈(雪) 시 모음 2

효림♡ 2018. 12. 1. 09:00

* 흰 눈은 높은 산에 - 이성선 

흰 눈은 높은 산에 와서 혼자

오래 머물다 돌아간다

새와 구름이 언제나 그곳으로

향하는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 눈 오시는 날 - 서정주 

내 연인(戀人)은 잠든 지 오래다.

아마 한 천년(千年)쯤 전에.....

 

그는 어디에서 자고 있는지,

그 꿈의 빛만을 나한테 보낸다.

 

분홍, 본홍, 연분홍, 분홍,

그 봄 꿈의 진달래꽃 빛깔들.

 

다홍, 다홍, 또 느티나무빛,

짙은 여름 꿈의 소리나는 빛깔들.

 

그리고 인제는 눈이 오누나.....

눈은 와서 내려 쌓이고

우리는 저마다 뿔뿔이 혼자인데

 

아 내 곁에 누워 있는 여자여.

네 손톱에 떠오르는 초생달에도

내 연인의 꿈은 또 한번 비친다. *

* 서정주자선시집[안 끝나는 노래]-정음사,1980

 

* 설조(雪朝) - 조지훈
천산에
눈이 내린 줄을
창 열지 않곤
모를 건가.

수선화
고운 뿌리가
제 먼저
아는 것을ㅡ

밤 깊어 등불 가에
자욱이 날아오던
상념의
나비 떼들

꿈속에 그 눈을 맞으며
아득한 벌판을
내 홀로
걸어갔거니 *


* 밤눈 ― 김광규 
겨울밤
노천 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

 

* 함박눈 - 이병률
행색이 초라한 어르신
게다가 큰 짐까지 든 그 곁을 따라 걷다가
억장이 무너지는 듯하여
식사는 하셨느냐고 물어요

한 끼만 묵어도 되는데
오늘은 두 끼나 묵었으예

날은 추워
마음은 미칠 것 같아
담배나 몇 갑 사 드릴까 하고
담배는 피우시냐고 물어요

오늘은 두 끼나 묵어서
안 태워도 되이예

이제부터 낮달과 제비꽃이 배고파 보여도
하나도 그 까닭을 모를라구요 *

 

* 겨울의 감정 - 이설야  

당신이 오기로 한 골목마다
폭설로 길이 가로막혔다
딱 한번 당신에게
반짝이는 눈의 영혼을 주고 싶었다
가슴 찔리는 얼음의 영혼도 함께 주고 싶었다
그 얼음의 뾰족한 끝으로 내가 먼저 찔리고 싶었다

 

눈물도 얼어버리게 할 수 있는
웃음도 얼어버리게 할 수 있는
겨울이라는 감정
당신이라는 기묘한 감정

 

눈이 내린다
당신의 눈 속으로
눈이 내리다 사라진다

 

당신 속으로 들어간 눈
그 눈을 사랑했다
한때 열렬히
사랑하다 부서져 흰 가루가 될 때까지
당신 속의 나를 사랑했다

 

그러나 오늘 다시 첫눈이 내리고
눈처럼 사라진
당신의 심장

 

내 속에서 다시 뛰기 시작한다 * 

* 이설야시집[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창비,2016

 

* 3월에 오는 눈 - 나태주

눈이라도 3월에 오는 눈은

오면서 물이 되는 눈이다

어린 가지에

어린 뿌리에

눈물이 되어 젖는 눈이다

이제 늬들 차례야

잘 자라거라 잘 자라거라

물이 되며 속삭이는 눈이다. *

 

* 폭설 - 이재무

  하느님도 가끔은 어지간히 심심하셔서 장난기가 발동하시나 보다. 지상에 하얀 도화지 한 장 크게 펼쳐놓으시고서

인간들을 붓 삼아 여기저기 괴발개발 낙서를 갈기시는 걸 보면. 그리고는 당신이 보시기에도 그 낙서들 너무 심란하고 어지러우면

한 사흘 뒤 햇살이나 비 지우개로 박박 문질러 말끔하게 지우시는 걸 보면. *

* 이재무시집[슬픔은 어깨로 운다]-천년의시작,2017

 

* 싸락눈 - 엄원태

고독은 그늘을 통해 말한다.

 

어쩌면 그늘에만 겨우 존재하는 것이 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늘로 인해 생은 깊어갈 것이다. 고통과 결핍이

그늘의 지층이며 습곡이다.

 

밤새 눈이 왔다.

말없이 말할 줄 아는, 싸락눈이었다. *

* 엄원태시집[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창비,2013

* 진눈깨비 - 기형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라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볼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

* 기형도전집-문학과지성사, 2000

 

*
눈이 내리는 까닭 - 복효근

실내에서 기르던 제비꽃이

꽃을 맺지 아니하거든

냉장고에 하루쯤 넣었다가 내놓으라고 합니다

한겨울 추위에 꽁꽁 얼어보지 않은 푸나무들은

제 피워낼 꽃의 형상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차고 시린 눈이 꽃처럼 내리는 것은

바로 그 까닭입니다

잠든 푸나무 위에 내려앉아

꽃의 기억들을 일깨워줍니다

내 안의 꽃들을 불러외우며

나 오늘 눈 맞으며 먼 길 에 돌아갑니다

* 복효근시집[목련꽃 브라자]-천년의 시작, 2005

 

* 눈이 내릴 것 같다 - 프랑시스 잠

며칠 안에 눈이 내릴 것 같다.

난로 옆에서 나는 떠올린다.

작년에 있었던 슬픈 일을.

왜 그러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것이다, 그냥 놔두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작년엔 내 방에서 생각에 파묻혔다.

밖에는 무거운 눈이 내리고 있던 때.

지금도 그때처럼 물부리 달린

나무 파이프를 피우고 있다.

내 오래된 떡갈나무 서랍장은

언제나 좋은 냄새가 난다.

그러나 나는 어리석었다.

우리를 둘러싼 것들이 변하지 않음에도

그저 밀어내고 싶다는 생각만 할 뿐.

 

도대체 왜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는 것일까?

이상하다, 눈물과 입맞춤엔 말이 없지만

그 의미를 우리는 잘 안다.

친구의 발소리가 다정한 말보다 더욱 정겹게 느껴지듯.

 

사람은 별에도 이름을 붙여주었다.

별들은 이름이 없어도 되건만.

어둠 속을 지나는 아름다운 행성도

부끄러워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 작년에 파묻혔던 내 오래된 슬픔은

어디로 갔는가, 이젠 생각도 나지 않지만,

나는 말할 것이다, 그냥 놔두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군가 내 방에 와서

왜 그러느냐 물어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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