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가을 시 모음 6

효림♡ 2018. 10. 31. 09:00

* 가을 저녁의 시 - 김춘수  

누가 죽어가는가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 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보다


살을 저미는 이세상 외로움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세월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만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에 스며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을

비길데없이 정한 목숨 하나

어디론가 물같이 흘러가버리는가 보다.

 

* 잎들 - 이시영

갈색 가을 나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제 발등을 수북이 덮고 있는 가을 잎들을 본다.

한때는 天上을 향해 푸르게 치솟았던 젊음들, 또 한때는 뜨거운 태양빛을 향해 시리게 몸 뒤척였을 영혼,

그러나 이제는 너른 생각의 잎사귀가 되어 제 어미의 발등을 조용히 덮다. *

* 이시영시집[사이]-창비,1996 

 

* 청아가을 -허수경

허연 새가 말라가는 병원 잔디밭을 서성인다

영원한 이별이 도둑처럼 노상 강도처럼

스친 자리 *

* 허수경시집[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창비,2001

 

* 가을의 시 - 
나뭇가지 사이로
잎들이 떠나가네
그림자 하나 눕네

길은 멀어
그대에게 가는 길은 너무 멀어

정거장에는 꽃그림자 하나
네가 나를 지우는 소리
내가 너를 지우는 소리

구름이 따라나서네
구름의 팔에 안겨 웃는
소리 하나,
소리 둘,
소리 셋,
무한(無限),

길은 멀어
그대에게 가는 길은 너무 멀어. *
* 강은교시집[어느 별에서의 하루]-창비,1996

 

* 가을밤 - 김영석 

이 밤 뚝 뚝 지는

저리 큰 오동잎 한 장으로도

귀뚜라미의 더듬이 하나 덮지 못하리

 

대피리 일곱 구멍

구멍마다 쏟이지는 달빛

그대 두 손으로는 다 막지 못하리 *

 

*  어떤 가을날 - 장석남

소금장수도 지나갔다

사과장수도 지나갔다

햇사과라고 했다

가을 대낮,

신발끈을 고쳐매듯 뜰에

햇볕들 서서 일부는

앉아서 있다

벌레 먹은 모과 몇 개

내 손길의 상부(上部)에 모여 있다

처음 보는 사랑이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무 한 그루를 옮겼다

조금 기울어진 것 같아 다시 가

똑바로 세우고 뿌리 쪽을 밟는다

다시 보니 서 있는 것은

지상의 단순한 죽음

꼿꼿한,

헌데 오, 죽음을 옮기다니

갑자기 겨울로 옮겨 심은 가을

죽음의 上部에서 처음 보는 사랑이

처음 보는 죽음을 내려다보고 있다

 

손을 씻어서 손을 감씨처럼 맑게 씻어서

조그만 길목 하나 가지고 싶다

담쟁이 넝쿨 빨갛게 물든

자꾸만 담쟁이 넝쿨 같은 한 여인이

모퉁이를 돌아 들어가는 길목 하나

감씨처럼 손 씻어서

지녀야겠다 *

* 장석남시집[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비,2001

 

* 구절초 - 이영진

화순 적벽 가는 길가에 구절초 피고 수몰지 물그림자 단풍져 붉다. 낡은 자전거에 도시락 얹고 페달에 힘을 주며 폐광이 다 된 광산을 향해 광부 하나 하얗게 가고 있다. 불꽃이었던 옛 사내, 어둔 땅 속으로 불을 캐려 간다. 푸른 하늘가, 농창 익은 연시가 불송이 보다 더 밝은 대낮, 화순 적벽 가는 길가에 구절초 피어 저 홀로 한세상 깊어만 가고 *

 

* 코스모스 - 
가만가만 코스모스가 흔들린다
얇은 핏빛 꽃잎이 바람의 음성을 듣는 고막 같다

욕설과 술로 보낸 이태 식은땀 흐르고 이명이 들릴때
사랑하는 여자의 간곡한 목소리로
다시 일어나던 날이 있었다

무능과 무책임만으로 여자를 보내지 않던 나는
세상에서 가장 뻔뻔한 사내였지만

바람을 떠나보내며 흔들리는 코스모스
햇살의 칼로 제 몸을 저며 바람을 잊지 않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얇아진 귀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바람을 듣고
흔들리지 않아도 울 것이다 코스모스 *
*김주대시집[그리움의 넓이]-창비,2012

 

* 추일단장(秋日斷章) - 조지훈  

1 
갑자기 
산봉우리가 치솟기에 

창을 열고 
고개를 든다. 

깎아지른 돌벼랑이사 
사철 한 모양 

구름도 한 오리 없는 
낙목한천(落木寒天)을 

무어라 한나절 
넋을 잃노. 

2 
마당 가장귀에 
얇은 햇살이 내려앉을 때 
장독대 위에 
마른 바람이 맴돌 때 

부엌 바닥에 
북어 한 마리 

마루 끝에 
마시다 둔 술 한잔 
뜰에 내려 영영(營營)히 
일하는 개미를 보다가 

돌아와 먼지 앉은 
고서(古書)를 읽다가..... 

3 
장미의 가지를 
자르고 
파초를 캐어 놓고 
젊은 날의 안타까운 
사랑과 

소낙비처럼 
스쳐간 
격정의 세월을 
잊어버리자. 

가지 끝에 매어달린 
붉은 감 하나 

성숙의 보람에는 
눈발이 묻어 온다. 

팔짱 끼고 
귀기울이는 

개울 
물소리. *

 

* 가을 계곡 - 이재무

처서 백로 거쳐 추분에 들자

계곡은 더욱 맑고 투명해졌다

바닥 환히 드러내 보이는 물빛

밝아진 시력으로

제 몸보다 훨씬 더 큰 것들을 담고는

평상심으로 제 갈 길 가고 있었다

손을 담그면 서늘한 기운 솟구쳐 올라

쭈뼛, 머리끝이 곤두서기도 했다

가끔, 나는 그곳에 들러

문장 연습을 하다 오고는 하였다 *

 

* 깊은 가을 - 나해철

가을은 내 가슴의 추수를 끝내버렸네

빈 기슭이 되었네

달던 과실도

알곡식도 푸르른 나뭇잎도 떠나버렸네

무엇으로 채울까

못 견디게 서늘한 바람만 부는데

목메이게 불러볼

그리운 이도 없는데

불타듯

부르짖어 기다리는 고운 세상도

멀기만 한데

꽃도 져버렸네 새도 가버렸네

가을은 내 가여운 넋마저

데리고 깊어져버렸네. *

* 나해철시집[아름다운 손]-창비,1993

 

* 落葉詩 - 신위(申緯) 

天地大染局 - 천지대염국
幻化何太遽 - 환화하태거
丹黃點飄蘀 - 단황점표탁
紅素吹花絮 - 홍소취화서
春秋迭代謝 - 춘추질대사
光景兩無處 - 광영양무처
空色顚倒間 - 공색전도간
冉冉流年去 - 염염유년거

- 낙엽시

천지는 거대한 염색 가게
환상의 변화를 어쩜 저리 서두를까?
발갛고 노란 잎을 점점이 날리는 바람
붉은 꽃과 흰 버들솜에 불어왔었네.
봄과 가을 번갈아 바뀌어도
태양은 양쪽 어디에도 머물지 않네.
공(空)과 색(色)이 뒤집히는 동안
성큼성큼 세월은 흘러가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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