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상사에서의 편지 - 신용목
감기에 종일을 누웠던 일요일 그대에게 가고 싶은 발걸음 돌려 실상사를 찾았습니다 자정의 실상사는 겨울이 먼저 와 나를 기다리고 천 년을 석등으로 선 石工의 살내음 위로 별빛만 속없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상처도 없이 낙엽은 섬돌에 걸려 넘어지고 석탑의 그림자만 희미하게 얼어가는 이 거역 없는 佛心의 뜰 안에 서서 < 여기 鐵佛로 支脈을 잡아 새나가는 國運을 막으리라 > 정녕 그대를 사랑한 것은 내 생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은빛 시린 서리처럼 오랜 세월 말없이 견디는 계절의 눈빛마다 속 졸이며 현상되는 기억을 대웅전 연꽃무늬 문살에 새기다가 사람의 가슴에도 깊이가 있다면 그대보다 멀리 있는 그대의 그리움 또한 아득히 잠기겠지요 실상사 긴 담장을 품고 산허리 꽃 피고 눈 내릴 때마다 더러는 못 참아 술값도 치러가며 떠나온 그 자리 여기 실상사 언제는 그립지 않은 시간이 있었냐며 풍경 소리는 바람의 몸의 더듬고 있었습니다
* 실상사 가는 길 1 - 이산하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문득
나는 돌 하나를 들어낸 다음
큰 절 앞의 작은 절처럼
그 자리에 들어가 앉는다
누가 내 머리의 급소를
가만가만 밟고 간다
절을 밟고 절로 가는 길
무게에 깊이를 더하는 자에겐
목을 숙여 등을 넓혔고
부피에 넓이를 더하는 자에겐
목을 세워 등을 깎았다
절 위로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허공에 생채기를 내며 날아간다
다음 새가 단청을 하며 날아간다
나는 징검다리를 다 건너지 못하고
돌아선다
* 실상사의 돌장승 -지리산에서 - 신경림
지리산 산자락
허름한 빈박집에서 한 나달 묵는 동안
나는 실상사의
돌장승과 동무가 되었다
그는 하늘에 날아 올라가
노래의 별을 따다주기도 하고
물속에 속꽂이해 들어가
애기의 조약돌을 주워다주기도 했다
헐렁한 벙거지에 퉁방울눈을 하고
삼십 년 전에 죽은
내 삼촌과 짝이 되어
덧뵈기춤을 추기도 했다
여름 산이 시늉으로 다리를 떨며
자벌레처럼 몸을 틀기도 했다
왜 나는 몰랐을까
그가 누구인가를 몰랐을까
문득 깨닫고 잠에서 깨어나 달려가 보니
실상사 그 돌장승이 섰던 자리에는
삼촌과 그의 친구들만이
퉁방울눈에 눈물을 그득 담고 서서
지리산 온 산에 깔린 열나흘 달빛에
노래와 얘기의
은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
* 실상사 - 이우걸
구름을 잠재우고 산을 잠재우고
나그네를 잠재우고 마을을 잠재우면서
불면의 밤을 가꾸는
너는 무엇인가?
방황은 외투처럼 네가 걸치는 화두일까
벼랑을 건너가는 종소리의 아픔일까
석장승 외진 입상의 정처 없는 시선일까.
뜰에 진 꽃잎 하나 무심히 줍는 사이
천년이 흘러가고 또 천년이 온다 해도
스스로 채워 둔 족쇄
풀 길 없는 사유의 강.
* 실상사_정도상에게 - 도종환
사람들은 네가 흰 소에 대해 말하는 줄 알지만
너는 불타는 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궁극이 흰 소인 줄 알지만
흰 소도 방편일 뿐
실상사 빈 방에 누워
불에 데이고 지친 몸을 식히기도 하고
스님이 건네주는 차 한 잔에
가벼운 평온을 얻어 마시며
불타는 집의 몸서리치는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실상사에 다녀온 것만으로
실상사를 만난 것은 아니다
실상사는 네가 버리고 온 고향집 마당에도 있고
아직도 운동판을 떠날 수 없는
몇 명의 관음보살 얼굴에도 있다
네가 만나야 할 것은 진여실상
매일 같이 네 안에서 너를 태우며
다시 살아나는 불길을 잡고
집을 태우는 불길마저 꺼버려
제법무아 거기까지 갔을 때
언덕 이쪽의 불타는 집과
저쪽의 교조적인 집까지 뛰어넘었을 때
너는 비로소 네 안에 실상사를
세우는 것이다
네 안의 실상사
그리고 내 안의 실상사를
* 공양 - 안도현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 울음 서른 되 *
* 안도현시집[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
* 실상사(實相寺)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지리산 천황봉에 있는 절.
- 국보 제10호 백장암 3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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