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흰 꽃 만지는 시간 - 이기철
아무도 없다고 말하지 마라
하얗게 씻은 얼굴로 꽃이 왔는데
흰 꽃은 뜰에 온 나무의 첫마디 인사다
그런 날은 사람과의 약속은 꽃 진 뒤로 미루자
누굴 만나고 싶은 나무가 더 많은 꽃을 피운다창고에서 새어 나오며 공기들은 가까스로 맑아지고
유쾌해진 기체들은 가슴을 활짝 열고 꽃밭을 산책한다
햇살의 재촉에 바빠진 화신은 좋아하는 사람께로 백리에 닿는다
눈빛 맑은 사람 만나면 그것만으로 한 해를 견딜 수 있다
흰 꽃 만지는 시간은 영혼을 햇볕에 너는 시간
찬물에 기저귀를 빨아 대야에 담는 사람의 흰 손이 저랬다
아름다운 사람이 앉았다 간 자리마다
다녀간 꽃들의 우편번호가 남아 있다
풀잎으로 서른 번째 얼굴을 닦는다
내일모레 언젠가는 그들이 남긴 주소로
손등이 발갛도록 흰 잉크의 편지를 쓰자 *
* 고요의 극지
이파리들이 바람의 이부자리를 펴는 때는 밤이다
고요에 고요가 얹히는 무게를 너한테 보내고 싶지만
헝겊에 쌀 수 없어 보내지 못한다
오늘는 강물의 발원을 묻지 않고 동요의 기원부터 묻는다
동요(童謠)의 발원은 새소리다
고요는 새들이 제 소리를 거두어 간 빈자리다
새가 아니라면 누가 노래를 만들 수 있나?
너무 오래 자고 나면 잎이 붉어질까 봐
새파란 손을 내밀어 햇빛을 붙잡는 가지들
짙푸른 어느 때 그들도 연애 감정에 젖었을 것이다
문득 어느 극단(極端)이 와서 나를 쳐 넘어뜨려도
나는 말문을 열고 '고요는 내 스승'이라 발음할 것이다
고요는 극지다
저 소수(小數)의 고요가 다수의 소음을 이기는 힘은
무게를 버리는 공기들
그 가벼운 체중 위로
그늘의 무게만큼 이파리들이 떨어진다 *
* 애잔
달빛 아래 벌레 한 마리 잠들었다
먹던 나뭇잎 반 장
내일 먹으려 남겨 두고
달빛 이불 덮었다
저 눈부신 애잔! *
* 꽃자리에 나도 앉아
꽃자리는꽃 몸이 누렸던 자리
떨기에서 떨켜까지의 거리는 나무가 딛고 간 발자국이다
그늘 드리운 자리 꽃살 무늬 지면
흙은 1년 내내 말문을 닫는다
신접살림 차린 나비 접빈객으로
더욱 환해진 열매의 변두리는 황홀에 젖고
단자엽 고황에 든 병 낫지 않아 오래 간다
부주키 소리로 맑아 오는 떡잎으로 하루는 길고
마주나기 잎들만 가지 끝 초록에 물 긷는다
꽃그늘로 문신 진 백년 흙 방석
아린 흉금으로도 못다 그려 여백으로 남긴
손톱으로 철필만 다듬는 분홍 꽃자리
삼라와 만상이 수고잠 자는
저 떨기들 곁에 나도 앉아
일생 한 번도 자리 펴 본 일 없는 꽃의 잠결로
뇌쇄에 젖어 전신 홍염으로 빼앗긴 마음 *
* 이기철시집[흰 꽃 만지는 시간]-민음사,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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