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흰 꽃 만지는 시간 - 이기철

효림♡ 2019. 4. 22. 09:00

* 흰 꽃 만지는 시간 - 이기철

아무도 없다고 말하지 마라

하얗게 씻은 얼굴로 꽃이 왔는데 

 

흰 꽃은 뜰에 온 나무의 첫마디 인사다

그런 날은 사람과의 약속은 꽃 진 뒤로 미루자

누굴 만나고 싶은 나무가 더 많은 꽃을 피운다

창고에서 새어 나오며 공기들은 가까스로 맑아지고

유쾌해진 기체들은 가슴을 활짝 열고 꽃밭을 산책한다

햇살의 재촉에 바빠진 화신은 좋아하는 사람께로 백리에 닿는다

눈빛 맑은 사람 만나면 그것만으로 한 해를 견딜 수 있다

흰 꽃 만지는 시간은 영혼을 햇볕에 너는 시간

찬물에 기저귀를 빨아 대야에 담는 사람의 흰 손이 저랬다

아름다운 사람이 앉았다 간 자리마다

다녀간 꽃들의 우편번호가 남아 있다

풀잎으로 서른 번째 얼굴을 닦는다

내일모레 언젠가는 그들이 남긴 주소로

손등이 발갛도록 흰 잉크의 편지를 쓰자 * 

 

* 고요의 극지

이파리들이 바람의 이부자리를 펴는 때는 밤이다

고요에 고요가 얹히는 무게를 너한테 보내고 싶지만

헝겊에 쌀 수 없어 보내지 못한다

오늘는 강물의 발원을 묻지 않고 동요의 기원부터 묻는다

동요(童謠)의 발원은 새소리다

고요는 새들이 제 소리를 거두어 간 빈자리다

새가 아니라면 누가 노래를 만들 수 있나?

너무 오래 자고 나면 잎이 붉어질까 봐

새파란 손을 내밀어 햇빛을 붙잡는 가지들

짙푸른 어느 때 그들도 연애 감정에 젖었을 것이다

문득 어느 극단(極端)이 와서 나를 쳐 넘어뜨려도

나는 말문을 열고 '고요는 내 스승'이라 발음할 것이다

고요는 극지다

저 소수(小數)의 고요가 다수의 소음을 이기는 힘은

무게를 버리는 공기들

그 가벼운 체중 위로

그늘의 무게만큼 이파리들이 떨어진다 *

 

* 애잔

달빛 아래 벌레 한 마리 잠들었다

먹던 나뭇잎 반 장

내일 먹으려 남겨 두고

달빛 이불 덮었다

 

저 눈부신 애잔! *

 

* 꽃자리에 나도 앉아

꽃자리는꽃 몸이 누렸던 자리

떨기에서 떨켜까지의 거리는 나무가 딛고 간 발자국이다

그늘 드리운 자리 꽃살 무늬 지면

흙은 1년 내내 말문을 닫는다

신접살림 차린 나비 접빈객으로

더욱 환해진 열매의 변두리는 황홀에 젖고

단자엽 고황에 든 병 낫지 않아 오래 간다

부주키 소리로 맑아 오는 떡잎으로 하루는 길고

마주나기 잎들만 가지 끝 초록에 물 긷는다

꽃그늘로 문신 진 백년 흙 방석

아린 흉금으로도 못다 그려 여백으로 남긴

손톱으로 철필만 다듬는 분홍 꽃자리

삼라와 만상이 수고잠 자는

저 떨기들 곁에 나도 앉아

일생 한 번도 자리 펴 본 일 없는 꽃의 잠결로

뇌쇄에 젖어 전신 홍염으로 빼앗긴 마음 *

 

* 이기철시집[흰 꽃 만지는 시간]-민음사,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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