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백치 애인 - 신달자

효림♡ 2009. 2. 3. 08:17

* 백치 애인 - 신달자

 

  나에겐 백치 애인이 있다.
그 바보의 됨됨이가 얼마나
나를 슬프게 하는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지를, 그리워하는지를 그는 모른다. 별 볼일 없이 우연히,  정말이지 우연히 저를 만날게 될까봐서 길거리의 한 모퉁이를 지켜 서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제 단골 찻집에서 찻집 문이 열릴 때마다 불길 같은 애수의 눈을 쏟고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길거리에서 백화점에서 또는 버스속에서 시장에서, 행여 어떤 곳에도 네가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긴장된 얼굴을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이 안타까움을 그는 모른다. 밤이면 네게 줄 편지를 쓰고 또 쓰면서 결코 부치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을 그는 모른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님이며,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이며, 내게 한 마디 말도 해오지 않으니 그는 벙어리이다.
  바보 애인아. 너는 나를 떠난
그 어디서나 총명하고 과감하면서, 내게 와서 너는 백치가 되고 바보가 되는가.
  그러나 나는 백치인
너를 사랑하며 바보인 너를 좋아한다. 우리가 불로 만나 타오를 수 없고 물로 만나 합쳐 흐를수 없을 때, 너는 차라리 백치임이 다행이었을 것이다. 너는 그것을 알 것이다.
  바보 애인아.
너는 그 허허로운 결과를 알고 먼저 네 마음을 돌처럼 굳혔는가. 그 돌 같은 침묵 속으로 네 감정을 가두어 두면서 스스로 너는 백치가 되어서 사랑을 영원하게 하는가.
  바보 애인아.
세상은 날로 적막하여 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큰 과업처럼 야단스럽고 또한 그처럼도 못하는 자는 절로 바보가 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그래, 바보가 되자. 바보인 너를 내가 사랑하고 백치인 네 영혼에 나를 묻으리라.
  바보 애인아. 거듭 부르는 나의 백치 애인아. 
잠에 빠지고 그 마지막 순간에 너를 부르며 잠에서 깬 그 첫 여명의 밝음을 비벼집고
너의 환상을 좇는 것을 너는 모른다. 
너는 너무 모른다. 정말이지 너는 바보, 백치인가.
  그래 백치이다. 우리는 바보가 되자.
이 세상에 아주 제일가는 바보가 되어서 모르는 척하며 살자. 기억 속의 사람은 되지 말며 잊혀진 사람도 되지 말며 이렇게 모르는 척 살아가자. 우리가 언제 악수를 나누었으며 우리가 언제 마주앉아 차를 마셨던가. 길을 걷다가 어깨를 부딪고 지나가는 아무 상관없는 행인처럼 그렇게 모르는 척 살아가는 거다.  
  바보 애인아.
아무 상관없는 그런 관계에선 우리에게 결코 이별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나의 애인이다. 백치 애인이다. 
아, 영원한 나의 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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