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책 - 김수영(金秀映)

효림♡ 2009. 1. 13. 08:20

* 책 - 김수영(金秀映) 

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첫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

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 

 

* 로빈슨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랜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파도
저마다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사이의 한 섬
그 속에 갇힌 한 사람을 생각한다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 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물거품으로 부서져가는 것을 본다
점점 어두워오는 바다로 가는 물결
무슨 그리움이 저 허공 뒤에 숨어 있을까
 *

 

해금을 켜는 늙은 악사 
그의 손가락이 현 위에서 춤을 추자
한때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던
주름진 미간이 떨린다
두 줄 현 위에서 길을 잃은 것은 아닌지
죄었다 풀며 현 위를 구르는 소리가
그를 이 세상 밖으로 밀어낸 건 아닌지
그가 빠졌던 숱한 구렁
그 굽이에서 건져올리는 저 질긴 소리

굿판에 서지 않으면 온몸이 시름인
저 늙은 년의 굿에는 마른천둥이라도 불러야지
숨가쁜 북장단에 무당은
시퍼런 양날 작두 위에 서고
그는 한치 제겨디딜 데 없는
두 줄 현 위에 서서 먼 곳을 본다 *

* 김수영시집[오랜 밤 이야기]-창비

 

* 김수영(金秀映)시인

-1967년 경남 마산 출생

-199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남행시초] 등단

-시집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오랜 밤 이야기]

'좋아하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 - 정호승   (0) 2009.01.20
목포 - 문병란  (0) 2009.01.19
모닥불 - 백석  (0) 2009.01.13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 김영랑  (0) 2009.01.13
설날 아침에 - 김종길  (0) 2009.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