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
김수영(金秀映) 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책이지요. 첫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
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
* 로빈슨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가슴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파도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 해금을 켜는 늙은 악사 * 김수영시집[오랜 밤 이야기]-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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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영(金秀映)시인
-1967년 경남 마산 출생
-199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남행시초] 등단
-시집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오랜 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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