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이육사 시 모음

효림♡ 2009. 4. 2. 08:29

*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 광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 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민음사  

 

* 절정(絶頂)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 꽃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나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城)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 

 

* 황혼(黃昏) 
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맘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十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修女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우 그 많은 囚人들에게도
의지할 가지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인디안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오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푸른 커-텐을 걷게 하겠지 
情情이 사라지는 시냇물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보다 *
* 이육사시집[광야]-미래사

 

* 교목(喬木)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

 

*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꼭 한개의 별을

십이성좌(十二星座) 그 숱한 별을 어찌 다 노래하겠나                                          

 

꼭 한 개의 별을! 아침 날 때 보고 저녁 들 때도 보는 별

우리들과 아주 친하고 그중 빛나는 별을 노래하자

아름다운 미래를 꾸며 볼 동방(東方)의 큰 별을 가지자

 

한 개의 별을 가지는 건 한 개의 지구를 갖는 것

아롱진 설움밖에 잃을 것도 없는 낡은 이 땅에서

한 개의 새로운 지구를 차지할 오는 날의 기쁜 노래를

목 안에 핏대를 올려 가며 마음껏 불러 보자

 

처녀의 눈동자를 느끼며 돌아가는 군수야업(軍需夜業)의 젊은 동무들

푸른 샘을 그리는 고달픈 사막의 행상대(行商隊)도 마음을 축여라 

화전(火田)에 돌을 줍는 백성들도 옥야천리(沃野千里)를 차지하자

 

다같이 제멋에 알맞는 풍양(豊穰)한 지구를 주재자로

임자 없는 한 개의 별을 가질 노래를 부르자

 

한 개의 별 한 개의 지구 단단히 다져진 그 땅 위에

모든 생산의 씨를 우리 손으로 흩뿌려 보며

영속처럼 찬란한 열매를 거두는 향연엔

예의의 꺼림없는 반취(半醉)의 노래라도 불러보자

 

염리(厭離)한 사람들을 다스리는 신(神)이란 항상 거룩하시니

새벽을 찾아가는 이민(移民)의 그 틈엔 안 끼여 갈테니

새로운 지구엔 단죄없는 노래를 진주처럼 흩치자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다만 한 개의 별일망정

한 개 또 한 개의 십이성좌 모든 별을 노래하자 *

* 김명수저[광야의 별 이육사]-창비

 

* 이육사(李陸史)시인 
-1904~1944 경북 안동 사람   
-1925년 형 원기, 아우 원유와 함께 대구에서 의혈단에 가입, 독립지사  
-1933년 [신조선]-[황혼] 발표  
-1946년 유고를 정리, 서울출판사에서 첫 시집 [육사시집]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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