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이생진 시 모음

효림♡ 2009. 4. 1. 08:16

* 그리운 바다 성산포 - 이생진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난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수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놓아주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

* [당신이 그리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책만드는집

 

* 벌레 먹은 나뭇잎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
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이 잘못인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

 

시를 훔쳐가는 사람
"○○ 시인님
시 한 편 훔쳐갑니다
어디다 쓰냐구요?
제 집에 걸어두려고요"

얼마나 귀여운 말인가
시 쓰는 사람도
시 읽는 사람도
원래는 도둑놈이었다
세상에 이런 도둑놈들만 들끓어도
걱정을 않겠는데
시를 훔치는 도둑놈은 없고
엉뚱한 도둑놈들이 들끓어 탈이다

내 시도 많이 훔쳐가라
하지만 돈 받고 팔지는 마라
세상은 돈 때문에 망했지
시 때문에 망하지는 않았다

 

* 행복한 사람
날 때부터
손바닥에 사랑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종달새처럼
사랑때문에 새벽부터
하늘로 날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노랑나비처럼
사랑때문에 푸대접을 받아도
꽃에서 잘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다람쥐처럼
사랑 때문에
산에 가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

오늘 사랑이 있어
미래도 모르고 오늘만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 서귀포 칠십리길  

음 

됐어 

바다가 보이면 됐어 

서귀포 칠십리 

어느 틈으로든 

바다가 보이면 됐어 

시가 밥처럼 씹히는 날 

곁에 바다가 있다는 건 

죽어서도 어머니 곁이라는 거 

나는 쉽게 바다에 물들어서 좋아 

 

음 

됐어 

바다가 보이면 됐어 *

 

* 가을 바다
산도 가을이지만
바다도 가을이다
가을 산은 풍요로워서 좋고
가을 바다는 쓸쓸해서 좋다
가을 산엔 떨어진 열매가 많고
가을 해변엔 버리고 간 쓰레기가 많다
아직 한 모금의 커피가 남아 있는

 

* 사랑했다는 사실  

사랑에 실패란 말이 무슨 말이냐
넓은 들을 잡초와 같이
해지도록 헤맸어도 성공이요
 
맑은 강가에서
송사리 같은 허약한 목소리로
불러봤다 해도 성공이요
 
끝내 이루지 못하고
혼자서만 타는 나무에 매달려
가는 세월에 발버둥쳤다 해도 성공이요
 
꿈에서는 수천 번 나타났다
생시에는 실망의 얼굴로 사라졌다 해도 성공이니
 
기뻐하라
사랑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라

 

* 꽃처럼 살려고
꽃피기 어려운 계절에 쉽게 피는 동백꽃이
나보고 쉽게 살라 하네
내가 쉽게 사는 길은
쉽게 벌어서 쉽게 먹는 일
어찌하여 동백은 저런 절벽에 뿌리 박고도
쉽게 먹고 쉽게 웃는가
저 웃음에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닌지

'쉽게 살려고 시를 썼는데 시도 어렵고 살기도 어렵네
동백은 무슨 재미로 저런 절벽에서 웃고 사는가
시를 배우지 말고 동백을 배울 일인데’

이런 산조(散調)를 써놓고
이젠 죽음이나 쉬웠으면 한다
 
* 동백다방  
동백다방에는 여우 같은 여자와
토끼 같은 여자 둘이 차를 파는데
알고 보면 둘 다 양 같은 여자들이다

그들은 용감하다고 해야 한다
여자의 몸으로 이런 고도에
겨울까지 살아남는다는 것은
동백나뭇잎보다 두꺼운 체질이다
그래도 얼굴이 배추속 같고
다리는 무같이 희다

혹시 우리 동네에서
가출했다는 아가씨가 아닌가 했더니
여우 같은 여자는 수원서 왔고
토끼 같은 여자는 대전서 왔다 한다
둘 다 먼 데서 와서 더 양 같아 보인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보고 양 같다고 한다
뭍에는 밤이고 낮이고 놀 데가 많은데
목포에서 사흘씩이나 기다려
바람 부는 겨울날 홍도에 왔다니
동백꽃을 보러 왔다면
미친 양 같다고 할 거다

그러나 둘 다 양 같은 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머닌?
아버진?
형제는? 하고 물으면
눈물바다가 될 것 같아서 말았다

'길 잃은 양'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여우 같은 여자는
담배를 손가락에 끼고
천장을 쳐다보며 연기를 뿜더니
“내년 봄엔 어디로 가지?” 한다

자욱한 연기가 장님처럼 창문을 더듬는다
 
* 하늘로가려던나무
나무가 겁없이 자란다
겁없이 자라서 하늘로 가겠다한다
하지만 하늘에 가서 무얼한다
갑자기 허탈해진다
일요일도 없는
하늘에 가서 무얼한다
나무는
그지점에서 방황하기 시작한다
 
* 고백
이젠 잊읍시다
당신은 당신을 잊고
나는 나를 잊읍시다

당신은 내게 너무 많아서 탈
당신은 당신을 적게 하고
나는 나를 적게 합시다

당신은 너무 내게로 와서 탈
내가 너무 당신에게로 가서 탈
나는 나를 잊고
당신은 당신을 잊읍시다

* 유혹

神은 날 직선으로 유혹했지만
나는 항상 곡선으로 달아났다
圓으로 둘러주는 사슬을
가슴으로 풀며
조금씩 생기는 자유는
혼자 쓰기도 모자라서
기다리며 살아왔다

* 섬마당의 아이들
바다가 앞뒤로 들어찬 섬마당에서
아이들은 즐겁다
복잡한 내일이 보이지 않아 오늘이 즐겁다
소나무는 크면서 물 건너 미래가 보이는데
아이들은 고개를 들어도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십 년 후엔 노인만 남을 것 같고
오십 년 후엔 소나무만 남을 것 같은 마을
지금 아이들에겐 그것이 보이지 않아 즐겁다

* 취한 사람
취한 사람은
사랑이 보이는 사람

술에 취하건
사랑에 취하건
취한 사람은
제 세상이 보이는 사람

입으로는 이 세상
다 버렸다고 하면서도
눈으로는 이 세상
다 움켜쥔 사람

깨어나지 말아야지
술에 취한 사람은 술에서
사랑에 취한 사람은 사랑에서
깨어나지 말아야지

* 석모도 - 고독한 벌레  

섬에서 고독은 빈 집 문패 같은 것

강화도 건너 또 다른 섬 하나

석모도(席毛島)의 고독은 그런거

마애불상(磨崖佛像) 앞에서 경을 읽는 스님의 고독도 그런지

외로움 한데 모아 목탁을 쏟고

저도 낙가산(落迦山) 바윗돌에 부딪쳐

산울림 되는 아픔

고독은 신앙마저도 무우 베어 먹듯

베어 먹는 새파란 벌레 

 

* 이생진시인

-1929년 충남 서산 사람

-김현승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1996년 윤동주 문학상,2002년 상화 시인상 수상 

-시집으로 [그리운 바다 성산포][동백꽃 피거든 홍도로 오라][먼 섬에 가고 싶다][인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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