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은행나무 - 곽재구

효림♡ 2015. 3. 4. 09:00

 

* 은행나무 - 곽재구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
맑은 바람결에 너는 짐짓
네 빛나는 눈썹 두어 개를 떨구기도 하고
누군가 깊게 사랑해 온 사람들을 위해
보도 위에 아름다운 연서를 쓰기도 한다
신비로와라 잎사귀마다 적힌
누군가의 옛추억들 읽어가고 있노라면
사랑은 우리들의 가슴마저 금빛 추억의 물이 들게 한다
아무도 이 거리에서 다시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
벗은 가지 위 위태하게 곡예를 하는 도롱이집 몇 개
때로는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가
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가지 끝에 걸고
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선다 해도
수천만 황인족의 얼굴 같은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희망 또한 불타는 형상으로 우리 가슴에 적힐 것이다 *

 

* 은행나무 - 안도현 

산서면사무소 앞

아름드리 은행나무 두 그루가

어느날,

크게 몸을 흔들자

은행 알들이 우두두두 쏟아져내렸다

그게 너무 보기 좋아서

모두들 한참씩 바라보았다 *

 

* 운문사 뒤뜰 은행나무 - 문태준

비구니 스님들 사는 청도 운문사 뒤뜰 천 년을 살았을 법한 은행나무 있더라
그늘이 내려앉을 그늘자리에 노란 은행잎들이 쌓이고 있더라
은행잎들이 지극히 느리고 느리게 내려 제 몸 그늘에 쌓이고 있더라
오직 한 움직임
나무는 잎들을 내려놓고 있더라
흘러내린다는 것은 저런 것이더라 흘러내려도 저리 고와서
나무가 황금사원 같더라 나무 아래가 황금연못 같더라
황금빛 잉어 비늘이 물속으로 떨어져 바닥에 쌓이고 있더라
이 세상 떠날 때 저렇게 숨결이 빠져나갔으면 싶더라
바람 타지 않고 죽어도 뒤가 순결하게 제 몸 안에 다 부려놓고 가고 싶더라
내 죽을 때 눈 먼저 감고 몸이 무너지는 소릴 다 듣다 가고 싶더라 *

 

 

* 은행나무 - 박형권
사람 안 들기 시작한 방에 낙엽이 수북하다
나는 밥할 줄 모르고,
낙엽 한줌 쥐여주면 햄버거 한개 주는 세상은 왜 오지 않나
낙엽 한잎 잘 말려서 그녀에게 보내면
없는 나에게 시집도 온다는데
낙엽 주고 밥 달라고 하면 왜 뺨 맞나
낙엽 쓸어담아 은행 가서 낙엽통장 만들어달라 해야겠다
내년에는 이자가 붙어 눈도 펑펑 내리겠지
그러니까 젠장,
이 깔깔한 돈 세상에는
처음부터 기웃거리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낙엽 주워 핸드백에 넣는 네 손 참 곱다
밥 사 먹어라 *
* 박형권시집[전당포는 항구다]-창비,2013

 

 

* 은행나무 - 김진경 

가을이 와서

노랗게 물들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벽장에 노란 삼베 수의를 모셔 두고

가끔씩 들여다보는

어머니의 수줍은 웃음처럼

그것이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쓸쓸함인지 흐뭇함인이 알 수 없지만

가을이 와서

노랗게 물들 수 있다는 건 찬란한 일입니다.

얼굴만 한 번 보고

시집갈 날을 기다리는 새색시가

신랑의 얼굴을 그리고 또 그려 보며

새 삶을 익히듯

어머니는

옛 추억을 맞춤법 틀리는 글씨로 적어

삼베 수의 밑에 묻어 두기도 하다가

죽음이 신랑처럼 그리워지는 듯도 하는 저녁

노란 삼베 수의를 펼쳐

신부의 예복처럼 몸에 대어 보기도 합니다.

가을이 와서 노랗게 물든다는 건

물들지도 못하고 비명처럼 떨어져 구르다

찾아와 누운 나에게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느냐는 준엄한 꾸짖음입니다.

가을이 와도

사람들에겐 그리움이 없습니다.

그리움이 없는 사람들이

비명처럼 도시의 빈 거리를 서성이다

이 저녁에 경악하는 얼굴로 잠이 듭니다.

아무도 만나지 못한 게절이

창밖 어둠 속에서

좀처럼 잠들지 못한 채 홀로 서성이고

가을이 와서

노랗게 물들 수 있다는 건

참으로 찬란한 일입니다. *

 

 

* 은행(銀杏) -우리 부부의 노래 - 구상

나 여기 서 있노라.

나를 바라고 틀림없이

거기 서 있는

너를 우러러

나 또한 여기 서 있노라.

 

이제사 달가운 꿈자리커녕

입맞춤도 간지러움도 모르는

이렇듯 넉넉한 사랑의 터전 속에다

크낙한 순명의 뿌리를 박고서

나 너와 마주 서 있노라.

 

일월도 우리의 연륜을 묵혀가고

철따라 잎새마다 꿈을 익혔다

뿌리건만

오직 너와 나와의

열매를 맺고서

종신토록 이렇게

마주 서 있노라. *

* 강판권지음[은행나무]-문학동네

 

* 황금방석 - 고진하

노란 은행잎들이 제 몸을 떠나는

결별의 의식을 행하는 동안,

먼저 떨어진 황금알을 주워 비닐봉지에 담고 있었지.

찬바람이 은행잎들을 천지사방 날려

한 그루 고독의 수역(樹域)을 넓히는 동안

숲속 사원에서 울려오는 독경 소리는

나뭇가지를 흔들며 노란 법어(法語)들을 흩날렸지.

황금알 줍는 재미에 흠뻑 빠져

끼니때도 잊어비리고

법어 따위도 귓등으로 들으며 비닐봉지를 채우다가

말랑말랑한 황금알을 잘못 밟아

주욱 미끄러지며 쿵, 엉덩방아를 찧었지. 순간,

털썩 주저앉는 나를 황금방석이 얼른 받쳐주었어.

아, 평생 처음 앉아본 황금방석!

그렇게

황금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얼마를 거들먹거리고 있었던가. 문득

곁에서 구린내가 솔솔 올라와 코를 찔렀지.

아불싸!

씨앗을 감쌌던 황금 과육이 터져

내 엉덩이며 장갑 낀 손까지 적셔버린 것이었어.

왜 황금이 있는 곳마다

이토록 구린 냄새가 진동할까.

바람결에 악취를 날릴 요량으로

가까운 언덕배기로 허위허위 올라갔지.

수령이 무려 팔백이라는, 장렬한 임무를 다 마친

늙은 고독이, 허허로운 늦가을 허공 속으로

폐선(廢船)처럼 흔들리며 떠가고 있었어. *

* 강판권지음[은행나무]-문학동네

 

* 낙엽을 위한 파반느 - 이병금

세상이 잠시 황금빛으로 장엄하다
노란 은행잎들이
마지막 떠나가는 길 위에서
몸 버리는 저들 중에 어느 하나
생애에서 목마른 사랑을 이룬 자 있었을까
마침내 행복한 자가 그 누구였을까
최후까지 등불을 끄지 않는
기다림의 시간만이 저 혼자 깊어간다
몸은 땅에 떨어져 나뒹굴지라도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노라고
남은 불꽃을 당기는 저들만의
그리움이 안타깝게 쌓여가고 있다 *

* 고규홍저[나무가 말하였네]-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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