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봄 시 모음 5

효림♡ 2015. 3. 4. 09:00

* 봄날 - 오세영 

사립문 열어 둔 채 주인은 어디 갔나
산기슭 외딴 마을 텅 빈 오두막집
널어 논 흰 빨래들만 봄 햇살을 즐긴다.
추위 물러가자 주인은 마실 가고
한 그루 벚나무만 덩그러니 꽃 폈는데
뒷산의 뻐꾹새 울음 마당 가득 쌓인다. *

 

* 봄산 - 조동화

이 크고 아득한 누리
누가 무슨 종을 울리기에
산이란 산마다
저렇게 화사하게 깨어난단 말이냐! *

 

* 마흔 번째 봄 - 함민복  

꽃 피기 전 봄산처럼
꽃 핀 봄산처럼
꽃 지는 봄산처럼
꽃 진 봄산처럼


나도 누구 가슴
한 번 울렁여 보았으면

 

* 다정에 바치네 - 김경미 

당신이라는 수면 위

얇게 물수제비나 뜨는 지천의 돌조각이란 생각

성근 시침질에 실과 옷감이나 당겨 우는 치맛단이라는 생각

물 컵 속 반 넘게 무릎이나 꺽인 나무젓가락이란 생각

길게 미끄러져버린 검정 미역 줄기란 생각

 

그러나

봄 저녁에 듣는 간절한 한마디

 

저 연보라빛​ 산벚꽃 산 벚꽃들 아래

언제고 언제까지고 또 만나자

 

온통 세상의 중심이게 하는. *

 

* 시인의 봄 - 김경미  

낯선 여직원과 서류 때문에
말다툼할 순간
유리창과 백목련 자목련 햇빛들
몸 기울여 구경 온다

입을 다무는 쪽만이 시인이 되는 것

그대도 어디선가는 분홍색 뺨이고 자목련이며
풍선 같은 애인이고 불쌍함이리라

소금 심어
벚꽃 한 됫박 얻는다 *

 

* 아득한 한뼘 - 권대웅 

멀리서 당신이 보고 있는 달과

내가 바라보고 있는 달이 같으니

우리는 한 동네지요

이곳 속 저 꽃

은하수를 건너가는 달팽이처럼

달을 향해 내가 가고

당신이 오고 있는 것이지요

이 생 너머 저 생

아득한 한 뼘이지요

그리움은 오래되면 부푸는 것이어서

먼 기억일수록 더 환해지고

바라보는 만큼 가까워지는 것이지요

꿈속에서 꿈을 꾸고 또 꿈을 꾸는 것처럼

달 속에 달이 뜨고 또 떠서

우리는 몇 생을 돌다가 와

어느 봄밤​ 다시 만날까요. *

 

* 봄바람이 달려와 내 눈물을 말려주니 - 신현수 
점심시간에
밥 빨리 먹으라고 성화를 부린 후
아이들 몇 명을 데리고 학교 앞 야산에 오른다.
핑계는 등산하면서 상담하기지만
실은 내가 더 가고 싶었다.
아이들은 계단 몇 개밖에 안 올랐으면서
힘들다고, 너무 가파르다고, 목마르다고
지랄발광을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하고는
나를 떼어놓고
지들끼리만
저만치 앞서서 뛰어 올라간다.
등산로 옆 개나리는 아이들과 함께 떠들고
솔숲 사이 진달래는
뭐가 부끄러운지
몰래 숨어 있다.
산꼭대기 전봇대 밑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이 노래를 하기로 했다.
가위 바위 보에서 진 놈이 뜬금없이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멋지게 부른다, 4월인데.
뜬금없이 눈물이 찔끔 흐른다.
아이들에게 그런 노래를 가르쳐 준 중학교 음악선생이 고맙다.
봄바람이 달려와 내 눈물을 말려 주니
조금, 행복하다. *

 

* 봄비 - 박시교

무위(無爲)와 잘 놀다간 내 시우(詩友) 신현정이
‘훔쳐 간 자전거’ 타고 구름 사이 누비다가
그곳에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며
오줌 갈기는
봄 한때

* 세상 끝의 봄 - 김병호  

수도원 뒤뜰에서

견습 수녀가 비질을 한다

 

목련나무 한 그루

툭, 툭, 시시한 농담을 던진다

 

꽃잎은 금세 멍이 들고

수녀는 떨어진 얼굴을 지운다

 

샛길 하나 없이

봄이 진다

 

이편에서 살아보기도 전에

늙어버린, 꽃이 다 그늘인 시절

 

밤새 혼자 싼 보따리처럼

깡마른 가지에 목련이 얹혀 있다

 

여직 기다리는 게 있느냐고

물어오는 햇살

 

담장 밖의 희미한 기척들이

물큰물큰 돋는, 세상 끝의 오후 *

 

* 봄 마중 - 김유신

달력 한 장만 넘어가면
봄이 한껏 차려입고
일요일엔 머리에 꽃을 꽂을 것이다
바람은 아직 거친 숨소리로 식식대고
착한 햇살이 겹겹 쌓인 오해를 풀고 있다
길 밖으로 나온 성질 급한 희망 한 무리
수천의 희망들이 씨앗처럼
틈새로 비치는 햇살을 핥고 있다
달력 한 장이 넘어가기를 기다리는
초조한 들숨들 사이
나는 양껏 양 볼을 부풀린다
새들의 복부도 따뜻해지는

 

* 봄비에 젖은 - 길상호

약이다

어여 받아먹어라

봄은

한 방울씩

눈물을 떠먹였지

차갑기도 한 것이

뜨겁기까지 해서

동백꽃 입술은

쉽게 부르텄지

꽃이 흘린 한 모금

덥석 입에 물고

방울새도

삐! 르르르르르

목젖만 굴러댔지

틈새마다

얼음이 풀린 담장처럼

나는 기우뚱

너에게

기대고 싶어졌지

 

* 봄 숲 - 복효근

그러니 그대여,

오늘은

내가 저이들과 바람이 나더라도

바람이 나서 한 사나흘 떠돌더라도

저 눈빛에

눈도 빼앗겨 마음도 빼앗겨

내 생의 앞뒤를 다 섞어버리더라도

용서해다오

세상에 지고도 돌아와 오히려 당당하게
누워 아늑할 수 있는 그늘이
이렇게 예비 되어 있었나니
그대보다도 내보다도
또 그 무엇보다도
내 남루와
또한 그대와 나의 마지막 촉루를
가려줄 빛깔이 있다면
그리고 다시 이 지상에 돌아올 때
두르고 와야 할 빛깔이 있다면
저 바로 저 빛깔은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대여
오늘은
저이들이랑 그대와 나와랑
함께 바람이 나버려서
저이들이 길어오는 먼 나라의 강물빛 아래 누워
서로를 들여다 보는 눈빛에서
엽록소가 뚝뚝 듣게 해도 좋겠다
저 숲나무 빛깔로 그대로 저물어도 좋겠다 *

* 복효근시집[목련꽃 브라자]-천년의시작, 2005

 

* 봄날 - 정호승 
내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친지에 냉이꽃은 하얗게 피었습니다

그 아무도 자기의 목숨을 버리지 않아도
천지는 개동백꽃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무심코 새 한 마리가 자리를 옮겨가는 동안

우리들 인생도 어느새 날이 저물고
까치집도 비에 젖는 밤이 계속되었습니다

내 무덤가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들의 새똥이 아름다운 봄날이 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보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더 아름다웠습니다 *
 

* 정호승시선집[내가 사랑하는 사람]-열림원, 2014

 

* 그해 봄 - 도종환 

그해 봄은 더디게 왔다

나는 지쳐 쓰러져 있었고
병든 몸을 끌고 내다보는 창밖으로

개나리꽃이 느릿느릿 피었다.
생각해보면

꽃 피는 걸 바라보며 십 년 이십 년
그렇게 흐른 세월만 같다

봄비가 내리다 그치고 춘분이 지나고

들불에 그을린 논둑 위로

건조한 바람이 며칠씩 머물다 가고

삼월이 가고 사월이 와도

봄은 쉬이 오지 않았다
돌아갈 길은 점점 아득하고

꽃 피는 걸 기다리며 나는 지쳐 있었다.
나이 사십의 그해 봄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2006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혼식 축시 모음  (0) 2015.06.22
수선화 시 모음  (0) 2015.04.03
은행나무 - 곽재구  (0) 2015.03.04
이사 시 모음   (0) 2014.09.25
선암사 시 모음  (0) 2014.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