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이사 시 모음

효림♡ 2014. 9. 25. 09:30

* 이사 - 신현정 

나 이사를 많이 하였다

 

이제 한 번 더 집을 이사해야 할 일이 남았다며는

 

달팽이집으로 가려고 한다

 

달팽이집에 기거하면서

 

더듬이를 앞장 세워

 

깃발들 느릿느릿 지나가게 하고

 

길가에 나무들

 

느릿느릿 지나가게 하고

 

초록을 느릿느릿 지나가게 하고

 

분홍을 느릿느릿 지나가게 하고 하겠다.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 이문재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

 

* 처음처럼 - 안도현 
이사를 가려고 아버지가
벽에 걸린 액자를 떼어냈다
바로 그 자리에
빛이 바래지 않은 벽지가
새것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집에 이사 와서
벽지를 처음 바를 때
그 마음
그 첫 마음,
떠나더라도 잊지 말라고
액자 크기만큼 하얗게
남아 있다 *

 

* 이사 - 권오삼

개미들이 줄지어 이사를 간다

저마다 뽀얀 알 하나씩 입에 물고

뽈뽈뽈뽈 새집으로 이사를 간다

한참이나 지켜봐도 이삿짐은 그뿐

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 컴퓨터, 장롱......같은 건

하나도 없다 *

* 이사 - 이해인 
몸이든
집이든
움직여야 살아난다
포기해야 새로 난다

욕심도 물건도
조금씩 줄이면서
선선히 내어놓고
제자리로 보내면서

미련 없이
환하게 웃을 수 있어야
이사를 잘 한 거다

옮기는 것이
결코 집이 되지 않는
가벼운 날

그런 날은
아마도 내가
세상에 없는 날이겠지?

 

* 이사 - 고증식 
이삿짐 내는 날
앞집 영감님 손 덥석 잡는다
'좋은 사람들은 다 떠나네'
할머니 덩달아 눈물 글썽거린다
십오년 문 맞대고 살면서
요술처럼 현관문에
상추며 고추 따위 매달리더니
어린 것들 흙 묻은 손에
떡이며 사탕이며
친할머니 손길처럼 따뜻하더니
잘 살아라 잘 살아라
영감님 덥석 움켜쥔 두 손
이삿짐 속에서 묻어나온다
할머니 글썽이는 눈물 덩달아
안방까지 따라와 선다
이삿짐 서둘러 떠나오던 날

 

* 이사(移舍) - 김수영 
이제 나의 방은 막다른 방
이제 나의 방의 옆방은 자연(自然)이다
푸석한 암석이 쌓인 산기슭이
그치는 곳이라고 해도 좋다
거기에는 반드시 구름이 있고
갯벌에 고인 게으른 물이
벌레가 뜰 때마다 눈을 껌벅거리고
그것이 보기싫어지기 전에
그것을 차단할
가까운 거리(距離)의 부엌문이 있고
아내는 집들이를 한다고
저녁 대신 뻘건 팥죽을 쑬 것이다 *

 

* 이사 - 김종제 

모두 이사갔다
불현듯 내몸이 무주공산이다
꽃 피는 봄인 줄만 알았더니
어느새 소나기 내리는 여름이란다
하룻밤 잠 들고 깨어나 보니
멀리서도 돌아와야 할 이유의
지붕 낮은
얼굴의 집도 사라지고
지친 팔다리 눕혔던
가슴속 작은 방도 사라지고
마당 한구석에
눈빛으로
햇볕 잘 들던 꽃밭도 사라지고
누군가 먼저 밟고 걸어간
입술이 물에 젖어
발 더럽혔던
진흙의 길도 사라지고 없다
손도 발도 뿌리를 스스로 걷어내고
문밖으로 걸어나갔다 
등뼈만 홀로 남겨 놓고
세상 밖의 어딘가로 이사갔다
어디 새집을 마련해 놓고 떠난 것일까
아니면 빚 독촉에 쫓겨난 것일까
하늘을 지붕 삼아
담도 울타리도 없는 들판을
방으로 삼아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의 가족이 되고 싶다고
누구와 일가를 이루어 살고 싶다고
나도 그들의 뒤를 따라 가면서
한 삶을 같이 지내야겠다

 

* 이사 - 정호승

낡은 재건축 아파트 철거작업이 끝나자

마지막으로 나무들이 철거되기 시작한다

아직 봄은 오지 않았는데

뿌리를 꼭 껴안고 있던 흙을 새끼줄로 동여매고

하늘을 우러러보던 나뭇가지를 땅바닥에 질질 끌고

이삿짐 트럭에 실려 가는 힘없는 나무 뒤를

까치들이 따라간다

울지도 않고

아슬아슬 아직 까치집이 그대로 남아 있는 나무 뒤를

울지도 않고 *

 

* 이사 - 이병률  

이삿짐을 싸다 말고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다 보니

그냥 두고 갈 뻔한 고추 몇 대

미안한 마음에 손을 내미니

빨갛게 매달린 고추가

괜찮다는 뜻 떨어진다

데려가달라고 하지 않으면

모른 체 데려가주지 않는 生

새벽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을 찌르는 매운 물기

 

* 이사 - 이병률  

봉투에 손을 넣어 비밀을 적자

 

손을 마저 잘라 봉투 안에 넣고 밀봉을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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