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선암사 시 모음

효림♡ 2014. 9. 1. 08:30

* 선암사 -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
* 정호승시집[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 선암사 - 김용택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변할까봐 내 마음 선암사에 두고 왔지요

오래된 돌담에 기대선 매화나무 매화꽃이 피면 보라고 

그게 내 마음이라고 

붉은 그 꽃 그림자가 

죄도 많은 내 마음이라고 

두고만 보라고 

두고만 보라고 

* 김용택시집[그래서 당신]-문학동네

 

* 당신 생각 - 김용택   

홍매 피는

선암사에 갑니다.

꽃이 지는 매화나무 아래에서

당신 생각 하겠어요.

하나 둘 셋 넷

지는 붉은 꽃잎이 땅에 닿기 전에

내 마음 실어

그대 곁으로

날려 보낼랍니다. *

 

* 조선 매화 (梅花) - 송수권
예닐곱 그루 성긴 매화 등걸이
참 서늘도 하다
서늘한 매화꽃 듬성듬성 피어
달빛 흩는데 그 그늘 속
무우전(無憂殿)* 푸른 전각 한 채도
잠들어 서늘하다
* 무우전(無憂殿) : 순천 선암사에 딸린 전각. 700년 된 참매화향이 유명함


* 그대라 이르는 화두 - 박남준

선암사 저녁 예불 운판을 친다 날짐승들아 그만 고단한 날개
를 접어라 목어를 친다 냇물의 고기들아 범종을 친다 산중의
모든 짐승들아 이 밤이 편안하거라 법고를 친다 떠도는 나를
않히고저 이는 번뇌로부터 마음을 끊고저 가슴은 북이 되어
울리네 두드려도 울어도 이 세상 그대라 이르는 찾을 길 없고
풀 길 없는 화두 하나 마음은 머리 풀어 구름처럼 헤매이네 

 

* 선암사 뒤간에서 뉘우치다 - 정일근  

무위도식의 오후, 불식을 했다면 산암사 뒷간으로 찾아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녁 예불시간 뱃속 근심이 큰 장독에 고인 물처럼 출렁거려 뒷간에 앉는다. 사실 나는 내 죄를 안다. 그리하여 범종소리 따라 한 겹 한 겹 밀려와 두꺼워지는 어둠에 엉덩이를 깔고 뉘우친다. 가벼워진 세상의 발들 殿을 돌아 장등丈燈이 밝혀주는 애웅전 앞 섬돌을 밟고 오를 시간, 나는 뒷간 무명 속에 발 저리도록 쪼그리고 앉아 진실로 뉘우친다.

내 죄의 반은 늘 식탐에 있다. 법고소리에 기름진 가죽이 함께 울고, 목어의 마른 울음 오장육부를 북북 긁고 간다.  운판 소리의 파편이 뼈 마디마디 파고들어 욱신거린다. 선암사 뒷간에 앉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근심을 버리자! 근심은 버리려 하지 말고 만들지 말아라. 뒷간 아래 깊은 어둠이 죽비를 들어 내 허연 엉덩이를 사정없이 후려친다. 마음을 비우자! 마음은 처음부터 비워져 있는 것이다.  나무 벽 틈새로 스며들어온 꽃샘바람이 주장자를 들어 내 뺨을 친다.

뱃속 근심이 우주의 근심을 만드는 저녁, 염주알 구르는 작은 원융의 소리에도 사방 십리 안 모든 봄나무들이 깨달음의 문을 열어 꽃등불을 켜는데, 나는 내 몸의 작은 뒷문 하나 열지 못하고, 단 몇 푼의 근심조차 내버리지 못한 채 선암사 뒷간에 쪼그리고앉아 뉘우친다.  

 

* 풍장(風葬) 40 - 황동규 
선암사 매화 처음 만나 수인사 나누고
그 향기 가슴으로 마시고
피부로 마시고
내장(內臟)으로 마시고
꿀에 취한 벌처럼 흐늘흐늘대다
진짜 꿀벌들을 만났다

벌들이 별안간 공중에 떠서
배들을 내밀고 웃었다.
벌들의 배들이 하나씩 뒤집히며
매화의 내장으로 피어……

나는 매화의 내장 밖에 있는가
선암사가 온통 매화
안에 있는가?

 

* 선암사 해우소 - 복효근 
선암사 매화 보러 갔다가
매화는 일러 피지 않고
뒤가 마려워 해우소 찾았지
똥 싸는 것도 사람의 일
별거 있느냐는 듯
칸마다 문짝도 없는 해우소
하얀 화장지 대신
손바닥만하게 잘라놓은 10년 지난 신문지
가즈런히 놓여 있어 들여다보니
옛 독재자 사진이
웃으며 신문에 박혀 있는데
일을 마치고 그놈으로 밑을 닦았지
내려다보니
깊이는 또 얼마나 깊은지
까마득한 바닥에서
큰스님 큰 근심도 내 작은
걱정도 독재자의 억지 웃음도
한가지 똥이 되어
그야말로 승속이 여일한데
화장실로는 번역할 수 없는 해우소
그 깊은 뜻 깨달았지
세상에 똥구린내가
매화향처럼 느껴지긴 난생 처음이었지

 

* 금목서(金木犀) - 정진규 
나 오늘 金木犀 보러 간다. 만나러 간다 선암사 간다 나무에 받히러 간다 풀리지 않은 직성 하나 있다 가서 쎄게 받히고 싶다 무소처럼 뚱뚱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무니까, 단단하기만 할 것이다 코뿔소 서자(犀字)를 보라 쎄다 이름이 그러하다 키가 클 것이다 나무니까 나무들은 진종일 하늘을 만진다 진종일 탱탱하다 마악 새로 돋은 그의 손끝이 하늘을 처음 만지다 조금 옴츠러들 것이다 하늘에도 조금 실금이 가거나 그럴 것이다 그러면 깨어날 것인가 끝내 기절할 것인가 다만 속도다, 단번이다 거기 벼락이 있을 것이다 단내가 난다 *
* 금목서-금목서의 서(犀)는 코에 뿔난 소 '서'. 무소를 가리킴. 물푸레나뭇과에 속함. 은목서(銀木犀)도 있음.

 

* 우수(雨水) - 나종영

선암사 해천당 옆에
수백년 묵은 뒷간 하나 있습니다
거기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문 틈새 이마 위로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木魚 흔들어 깨우고 가는
청솔 바람소리 보입니다
부스럭부스럭 누군가 밑닦는 소리 들리는데
눈 맑은 동박새가
매화 등걸 우듬지에 앉아
두리번두리번 뭐라고 짖어댑니다
천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새로운 천년이 무섭게 밀려오는지,
그 울음소리 대숲 하늘 한 폭 찢어놓고
앞산머리 훠이 날아갑니다
하릴없이 대나무 대롱 끝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 찬물을 삼키다가 옳거니
매화꽃 봉오리 움트는 소리,
겨울 산그늘 얼음꽃 깨치고
봄 햇살 걸어오는 것 보았습니다.

 

* 선암사(仙巖寺) 길 - 변준석

나, 이 세상 뜨기 전 마지막으로 걷고 싶은 길. 선암사 가는 길일세. 부도밭 장승백이 지나 산문(山門)에 들어서면, 호젓한 정신의 숲길. 승선교(昇仙橋) 아래서 세상 길에 지친 두 발 계곡 물에 담그고, 강선루(降仙樓) 바라보고 싶네. 산그늘 내리는 숲 속 어디선가 뻐꾸기 소리 열반송(涅槃頌)처럼 들려오리. 누각에 달빛 비치고, 날 데려갈 선녀 내려오면, 비단길 서역(西域) 길을 말없이 걸어가는 한 마리 낙타와도 같이, 나 저 허공을 터벅터벅 걸어 서쪽 하늘가 한 개 점으로 사라지려네. 나 이 세상 뜨기 전 마지막으로 걷고 싶은 길 하나. 선암사 길일세

 

* 선암사에서 시 쓰기 - 박남준  
선암사에 갔습니다. 구례을 지나 산동을 지나 조계산
선암사 가는 길가엔 봄날의 햇살을 터뜨리면 저러할까
노오란 산수유꽃빛 처연해 보입니다. 문득 가까이 혹은
멀리 여기저기 산자락에 희고 연붉은 매화꽃, 사태처럼
피어나서 차창을 열지 않아도 파르릉거리며 매화 향내
날아든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꽃빛에 따라서 들고
일어나는 마음이 변덕을 부리는 것을 보며 씁쓸한 자조가
파문져왔습니다.

산문에 들었습니다.  봄날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는
산빛 쇠락한 풍경, 언제 가보아도 눈에 띄게 화려하지도
웅장하여 주눅이 들게 하지도 않는 선암사는 한폭
담담한 수묵화 같아서 그때마다 가만히 고개 숙여집니다.

고답스런 산사 그 한편을 스르릉 열고 지허 스님이
차를 우려내시며 건네는 말씀, 어려운 시를 쓰느냐고
시는 참 어렵더라고, 스님들 중에도 더러 시를 쓰는
이들을 보았는데 선방에 들어 참선을 하시다가도 불쑥
불쑥 일어나 시상이 떠올랐다며 지대방으로 나가시는
걸 보았다고 한 이십년 참선을 하며 기다렸다가 시를
써보면 어떨까 하시는 말씀, 그 말씀 나를 일러 가리키는
것은 아닐지라도 참 부끄럽고 부끄러운 그야말로
할! 이었습니다.  언제 다시 선암사에 가서 스님의
그 말씀 모서리쳐질 때까지 살아볼 일입니다.

 

* 仙巖寺 - 金克己 

寂寂洞中寺  적적한 산골 속 절이요

蕭蕭林下僧  쓸쓸한 숲 아래 스님일세,

情塵渾擺落  마음속 티끌은 온통 씻어 떨어뜨렸고

智水正澄凝  지혜의 물은 맑고 용하기도하네

殷禮八千聖   팔천 성인에게 예배하고

淡交三要朋   담담한 사귐은 삼요의 벗일세

我來消熱惱   내 와서 뜨거운 번뇌 식히니

如對玉壺  마치 옥병 속 얼음 대하듯 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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