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고요 - 오규원

효림♡ 2009. 7. 1. 09:03

* 고요 - 오규원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
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
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
창 앞의 장미 한 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

 

* 발자국과 깊이 
어제는 펑펑 흰 눈이 내려 눈부셨고
오늘은 여전히 하얗게 쌓여 있어 눈부시다
뜰에서는 박새 한 마리가
자기가 찍은 발자국의 깊이를
보고 있다
깊이를 보고 있는 박새가
깊이보다 먼저 눈부시다
기다렸다는 듯이 저만치 앞서 가던
박새 한 마리 눈 위에 붙어 있는
자기의 그림자를 뜯어내어 몸에 붙이고
불쑥 날아오른다 그리고
허공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지워버린다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허공이 눈부시다

 

* 둑과 나

길은 바닥에 달라붙어야 몸이 열립니다

나는 바닥에서 몸을 세워야 앞이 열립니다

강둑의 길도 둑의 바닥에 달라붙어 들찔레 밑을 지나

메꽃을 등에 붙이고 엉겅퀴 옆을 돌아 몸 하나를 열고 있습니다

땅에 아예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미루나무는 단단합니다

뿌리가 없는 나는 몸을 미루나무에 기대고

뿌리가 없어 위험하고 비틀거리는 길을 열고 있습니다

엉겅퀴로 가서 엉겅퀴로 서 있다가 흔들리다가

기어야 길이 열리는 메꽃 곁에 누워 기지 않고 메꽃에서

깨꽃으로 가는 나비가 되어 허덕허덕 허공을 덮칩니다

허공에는 가로수는 없지만 길은 많습니다 그 길 하나를 혼자 따라가다

나는 새의 그림자에 밀려 산등성이에 가서 떨어집니다

산등성이 한쪽에 평지가 다 된 봉분까지 찾아온 망초 곁에 퍼질러 앉아

여기까지 온 길을 망초에게 묻습니다

그렇게 묻는 나와 망초 사이로 메뚜기가 뛰고

어느새 둑의 나는 미루나무의 그늘이 되어 어둑어둑합니다 *

 

* 여름에는 저녁을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마당 위에는
멍석
멍석 위에는
환한 달빛
달빛을 깔고
저녁을 먹는다

숲 속에서는
바람이 잠들고
마을에서는
지붕이 잠들고

들에는 잔잔한 달빛
들에는
봄의 발자국처럼
잔잔한
풀잎들

마음도
달빛에 잠기고
밥상도
달빛에 잠기고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밥그릇 안에까지
가득 차는 달빛

아! 달빛을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

 

* 나비 
작약꽃이 한창인 아파트단지의
화단을 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다
어린 후박나무를 지나 향나무를

지나 목단을 넘고 화단 가장자리의

쥐똥나무를 넘어 밖으로 가더니
다시 속으로 들어와
한창인 작약꽃을 빙글빙글 돌더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혼자 훌쩍 날아올라 넘더니
비칠대는 온몸의 균형을 바로잡고
날아넘은 허공을 뒤돌아본다
뒤돌아보며 몸을 부풀린다 *

 

* 꽃과 그림자  

앞의 길이 바위에 막힌 붓꽃의

무리가 우우우 옆으로 시퍼렇게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왼쪽에 핀 둘은

서로 붙들고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가운데 무더기로 핀 아홉은

서로 엉켜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오른쪽에 핀 하나와 다른 하나는

서로 거리를 두고 보랏빛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붓꽃들이 그림자를

바위에 붙입니다

그러나 그림자는 바위에 붙지 않고

바람에 붙습니다

 

* 버스 정거장에서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내미는
내 주민등록증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주민등록번호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안 된다면 안 되는 모두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어리석은 독자를
배반하는 방법을
오늘도 궁리하고 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며
오지 않는 버스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시를 모르는 사람들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

* 오규원시집[가끔은 주목받는 생(生)이고 싶다]-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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