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오규원 시 모음

효림♡ 2009. 7. 1. 09:04

* 봄 - 오규원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 집 개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 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롭다. 자 봐라, 꽃 피고 싶은 놈 꽃 피고, 잎 달고 싶은 놈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 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든가. 내 말이 옳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 강 

강은 처음부터 몸을 물로

낮은 곳이면 어디든 가서

함께 머물렀다 그러나 강은

그곳을 떠날 때

물은 그대로 두고 갔다

새들도 강에서 날개를 접을 때는

반쯤 몸을 물에

잠그고 있는 돌 위에

두 다리를 놓았다

 

* 새와 날개  

가지에 걸려 있는 자기 그림자

주섬주섬 걷어내 몸에 붙이고

새 한 마리 날아가네

날개 없는 그림자 땅에 끌리네 *

 

* 길과 길바닥

풀 한 포기와 나 사이

가을의

 

하나 * 

 

* 나무와 허공

잎이 가지를 떠난다 하늘이

그자리를 허공에 맡긴다 *

 

* 나무와 햇볕 
산뽕나무 잎 위에 알몸의 햇볕이
가득하게 눕네
그 몸 너무 환하고 부드러워
곁에 있던 새가 비껴 앉네 *

 

* 들찔레
꽃을 떨군 들찔레의 가지에
꽃 대신 줄줄이
빈자리가 달려 있다
줄줄이 빈자리가 달려도 들찔레의
가지는 가볍고
멍석딸기는 그늘에서
여전히 붉다 
 

 

* 쑥부쟁이

길 위로 옆집 여자가 소리지르며 갔다

여자 뒤를 그 집 개가 짖으며 따라갔다

잠시 후 옆집 사내가 슬리퍼를 끌며 뛰어갔다

옆집 아이가 따라갔다 가다가 길 옆

쑥부쟁이를 발로 툭 차 꺾어놓고 갔다

그리고 길 위로 사람 없는 오후가 왔다

 

* 봄과 밤

어젯밤 어둠이 울타리 밑에

제비꽃 하나 더 만들어

매달아놓았네

제비꽃 밑의 제비꽃 그늘도

하나 붙여놓았네 *

 

* 고통이 고통을 사랑하듯

나에게는 나의 결점

고통에게는 고통의 결점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나의 결점을 사랑하듯

고통이 고통을 사랑하고

고통이 고통의 결점을 사랑하듯

 

오늘보다는 내일, 내일보다는

내일의 내일에 속고 마는 나를

오늘의 시간이여, 내가 그 사랑을 알고 있으니

마음 놓고 사랑하소서 *

 

* 비가와도 젖는 자는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 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江은 젖지 않는다
나를 젖게 해 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江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魚族은 강을 거슬러 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번뇌, 날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者는 다시 젖지 않는다 *

 

*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순례 11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의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

 

* 바람은 뒤뜰에 와  

근래 와 말이 없어진 그대, 그대를 보며 나는 그대가 지난날 즐겨 찾던 때묻은 말들을 골라

본다. 근래 와 말이 없어진 그대는 지나가는 아이들의 욕지거리나 무릎 위에 앉히고, 근래

와 말이 없어진 그대의 뜰, 그대 뜰의 새가 한밤중이면 무슨 얘긴지 뒤뜰에서 주고받는 소

리를 잠결에 혼자 가끔 듣는다. 근래 와 말이 없어진 그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바람

은 뒤뜰에 와 나뭇잎 몇 개만 건드리다 그냥 떠나고, 계절은 개나리 몇 송이를 벌려놓고 그

대 집 앞을 총총히 지나간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을 알아들은 그대 뜰의 새가 그대의 말이

되어 때때로 담벽을 넘어 어디론가 다녀오는 모습을 나는 본다 *

 

* 씨앗은 씨방에 넣어 보관하고 
씨앗은
씨방에 넣어 보관하고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있는 바람은
잔디 위에 내려 놓고
밤에 볼 꿈은
새벽 2시쯤 놓아 두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는 일이다
가을은
가을 텃밭에 묻어 놓고
구름은 말려서
하늘 높이 올려 놓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겨울이 오는 길이
쓸쓸하지 않도록
몇 송이 코스모스를
계속 피게 하는 일이다
다가오는 겨울이
섭섭하지 않도록
하루 한 걸음씩
하루 한 걸음씩만
마중 가는 일이다

 

겨울숲을 바라보며
겨울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罪)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

 

* 절과 나무
나무 몇 그루가 묵묵히 가지 속에
자기 몸을 밀어넣고 있다

그 나무들 위에 절(寺)이 한 채 얹혀 있다

나무의 가지 끝까지 올라간 물이
나무에서 절 안으로 길을 내고 있는지
가지가 닿은 벽의 곳곳에 이끼가 끼어 있다

양광은 하늘에 가득하고
부처는 절 안에 있고
사람은 절 밖에서 나무에 잡혀 있다

바람이 불어도 절은 뒤에 있는
하늘에 붙어
흔들리지 않는다

 

* 서산과 해
고욤나무가 해를 내려놓자
이번엔 모과나무가 받아든다
아주 가볍게 들고 서서 해를
서쪽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옮긴다
가지를 서산 위에까지 보내놓고 있는
산단풍나무가 옆에서
마지막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한 무리의 새가 와서
산단풍나무 가지를 흔들어본 뒤
어디론가 몸을 감춘다

 

* 남들이 시를 쓸 때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잦다  

오늘도 감기지 않는 내 눈을 기다리다  

잠이 혼자 먼저 잠들고 잠의 옷도 잠의 신발도  

잠의 문비(門碑)도 잠들고  

나는 남아서 혼자 먼저 잠든 잠을  

내려다본다  

지친 잠은 내 옆에 쓰러지자마자 몸을 웅크리고  

가느다랗게 코를 곤다  

나의 잠은 어디 있는가  

나의 잠은 방문까지는 왔다가 되돌아가는지  

방 밖에서는 가끔  

모래알 허물어지는 소리만 보내온다  

남들이 시를 쓸 때 나도 시를 쓴다는 일은  

아무래도 민망한 일이라고  

나의 시는 조그만 충격에도 다른 소리를 내고  

잠이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나의 잠을  

누가 대신 자는가  

나의 잠은 잠의 평화이고  

나의 잠은 잠의 죽음이라고  

남의 잠은 잠의 꿈이고  

나의 잠은 잠의 현실이라고  

나의 잠은 나를 위해  

꺼이꺼이 울면서 어디로 갔는가

 

* 수수빗자루 장수와 가랑잎

몸에도 수수냄새가 풍기는

수수빗자루 장수가

길거리에 나타나면 

 

ㅡㅡ 타작도 끝난 모양이군

하고

가랑잎 하나 떨어지고 

 

ㅡㅡ 보리 갈이도 끝난 모양이군

하고

가랑잎 하나 떨어지고 

 

익은 수수처럼 구수한 목소리로

수수빗자루 장수 아저씨가

바쁜 농사일 끝내고

 

ㅡㅡ 수수 빗자루 사시오

하고

넉넉한 목소리로 외치며 골목을 돌아가면

 

ㅡㅡ 이젠 추워도 괜찮겠군

하고

가랑잎도 마음 놓고 떨어진다 

 

* 그대와 산  

그대 몸이 열리면 거기 산이 있어 해가 솟아오르리라,

계곡의 물이 계곡을 더 깊게 하리라, 밤이 오고 별이 몸을 태워 아침을 맞이하리라 *

* 오규원시집[두두]-문학과지성사

 

* 잣나무와 나  

뜰 앞의 잣나무로 한 무리의 새가//

날아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래도 잣나무는 잣나무로 서 있고//

잣나무 앞에서 나는 피가 붉다//

발가락이 간지럽다//

뒷짐 진 손에 단추가 들어 있다//

내 앞에서 눈이 눈이 온다//

잣나무 앞에서 나는 몸이 따뜻하다//

잣나무 앞에서 나는 입이 있다 *

* 오규원시집[두두]-문학과지성사

 

* 오후  

아침에는 비가 왔었다

마른번개가 몇 번 치고

아이가 하나 가고

그리고

사방에서 오후가 왔었다

돌풍이 한 번 불고

다시 한 번 불고

아이가 간 그 길로

젖은 옷을 입은 여자가 갔다 *

* 오규원시집[두두]-문학과지성사 

 

* 오규원(吳圭原)시인
-
1941년~2007년 경남 삼랑진 사람

-1968년 현대문학 [몇 개의 현상] 등단, 1982년 현대문학상, 1995년 이산문학상, 2003년 대한민국예술상 수상

-시집 [분명한 사건][오규원 시 전집][한 잎의 여자][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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