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묵(水墨)정원 -序 - 장석남
날이 새고 보니 水墨의
어느 정원 속이었다
안개가 돌을 감고 있었다
지나간 밤들 속에서 별을 관찰하던
자리였을까?
누가 살던 집인지
둥그렇게 집터가 있고
웃자란 나무들 하늘로 뻗쳤다
사금파리 흩어진
마른 개울 속에 침묵이
콸콸콸콸 흐르고 있었다
마른 노래를
물에 풀며
있었다
무명실 같은
노래를
저절로 나오는 노래는
속에서 누가 부르는 노래일까
눈 감았다 떠도 다시
수묵의 정원 속이었다
*수묵(水墨)정원 1 -강
먼길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강가에 이르렀다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버드나무 곁에서 살았다
겨울이 되자 물이 얼었다
언 물을 건너갔다
다 건너자 물이 녹았다
되돌아보니 찬란한 햇빛 속에
두고 온 것이 있었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다시 버드나무 곁에서 살았다
아이가 벌써 둘이라고 했다
* 수묵(水墨)정원 2 -마른 시냇가
마른 시냇가에 서서
지난 어느 시간
내가 보았던 구름의
자국을 찾아본다
마른 시냇가에 앉아서
한때 구름이었던 데를 만져본다
병상에서
어머니의 정강이를 만져보듯
깡마른 정강이를 만져보듯
* 수묵(水墨)정원 3 -물 긷는 사람
물通 하나 들고 가는 사람
물通 하나 머리에 이고 가는 사람
물通 지고 가는 사람
물 길으며 길바닥에 흘린 물자국
물 출렁이는 소리
通에 바가지 부딪는 소리
젖는 쑥대궁들
물通, 물항아리에 쏟는 소리
물항아리에
물 차오르면
어룽대는 물의 빛
고개 갸웃 하면 물 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람의 가슴에도 그런 윤기 같은 게 있을 뿐
우리가 가장 나중까지 지녀야 할
가난의 寶庫
물通 하나 지고 가며
* 수묵(水墨)정원 4 -북두칠성(北斗七星)
삶은 저렇듯 명료한 것도 아니니
너에게 하는 말은
말도
우물 속에다 하는 말처럼
울음도
우물에 빠치는 울음처럼
너에게 하는 말처럼
걸어 내려가는 길
무릎이 시려지는 걸음
그래서 차츰
안 보여지는 걸음
* 수묵(水墨)정원 5 -물의 길
바다에 나가는 수많은 길들 중에 내가 택한 길은 작은 냇
물을 따라가는 길이었네
내가 닿는 바다는 노인처럼 모로 누운 해안선의 한모퉁이였네
나를 내려놓고 길은 바닷속으로 잠겨들어가버리곤 했네
그러면 나는 두리번거리다가 그만 어둠이 되곤 했네
어둠을 이고 서 있는 소나무가 되어버리곤 했네
누군가 왜 그런 길을 택했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네
발을 다치지 않으려고 그렇게 했다고 대답했지만 그것이
대답이 될 수는 없다네
누군가 더 묻지 않은 것 참 다행이네
* 수묵(水墨)정원 6 -모색(暮色)
귀똘이들이
별의 운행을 맡아가지고는
수고로운 저녁입니다
가끔 단추처럼 핑글
떨어지는 별도
있습니다
* 수묵(水墨)정원 7 -우리는 늙으면
우리는 늙으면
저녁 별을 주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문턱에 앉아서 부는 바람도 느껴볼 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매일
저녁 별 보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날도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늙음 끝까지 신작로를
바라보고 창문 아래에
앉아서
저녁 별을 볼 것이다
그리고 먼지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 수묵(水墨)정원 8 -대숲
해가 떠서는 대숲으로 들어가고
또 파란 달이 떠서는 대숲으로 들어가고
대숲은 그것들을 다 어쨌을까
밤새 수런수런대며 그것들을 어쨌을까
싯푸른 빛으로만 만들어서
먼데 애달픈 이의 새벽꿈으로도 보내는가
대숲을 걸어나온 길 하나는
둥실둥실 흰 옷고름처럼 마을을 질러 흘러간다
* 수묵(水墨)정원 9 -번짐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ㅡ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
* 장석남시집[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비,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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