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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효림♡ 2009. 7. 6. 08:46

*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잔상
지나가는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

 

* 살구꽃

마당에 살구꽃이 피었다

밤에도 흰 돛배처럼 떠 있다

흰빛에 분홍 얼룩 혹은

제 얼굴로 넘쳐버린 눈빛

더는 알 수 없는 빛도 스며서는

손 닿지 않는 데가 결리듯

담장 바깥까지도 훤하다

 

지난 겨울엔 빈 가지 사이사이로

하늘이 튿어진 채 쏟아졌었다

그 하늘을 어쩌지 못하고 지금

이 꽃들을 피워서 제 몸뚱이에 꿰매는가?

꽃은 드문드문 굵은 가지 사이에도 돋았다

 

아무래도 이 꽃들은 지난 겨울 어떤,

하늘만 여러번씩 쳐다보던

살림살이의 사연만 같고 또

그 하늘 아래서는 제일로 낮은 말소리, 발소리 같은 것 들려서 내려온

神과 神의 얼굴만 같고

어스름녘 말없이 다니러 오는 누이만 같고

 

  (살구가 익을 때,

  시디신 하늘들이

  여러 개의 살구빛으로 영글어올 때 우리는

  늦은 밤에라도 한번씩 불을 켜고 나와서 바라다보자

  그런 어느날은 한 끼니쯤은 굶어라도 보자)

 

그리고 또한, 멀리서 어머니가 오시듯 살구꽃은 피었다

흰빛에 분홍 얼룩 혹은

어머니에, 하늘에 우리를 꿰매 감친 굵은 실밥, 자국들 *

 

* 장석남시집[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