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찬비 내리고 - 나희덕

효림♡ 2009. 7. 9. 09:01

* 찬비 내리고 -편지 1 - 나희덕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을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

 

*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 때 -편지 2

세상이 나를 잊었는가 싶을 때
날아오는 제비 한 마리 있습니다
이젠 잊혀져도 그만이다 싶을 때
갑자기 날아온 새는
내 마음 한 물결 일으켜놓고 갑니다
그러면 다시 세상 속에 살고 싶어져
모서리가 닳도록 읽고 또 읽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게 되지요
제비는 내 안에 깃을 접지 않고
이내 더 멀고 아득한 곳으로 날아가지만
새가 차고 날아간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 때
그 여운 속에서 나는 듣습니다
당신에게도 쉽게 해 지는 날 없었다는 것을
그런 날 불렀을 노랫소리를

 

* 젖지 않는 마음 -편지 3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 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 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는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 殘雪 -편지 4  

잔설처럼 쌓여 있는 당신

그래도 드문드문 마른 땅 있어

나는 이렇게 발 디디고 삽니다

폭설이 잦아드는 이 둔덕 어딘가에

무사한 게 있을 것 같아

그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보면서

굴참나무, 사람주나무, 층층나무, 가문비나무......

나무 몇은 아직 눈 속에 발이 묶여 오지 못하고

땅이 마르는 동안

벗은 몸들이 새로운 빛을 채우는 동안

그래도 이렇게 발 디디고 삽니다

잔설이 그려내는 응당과 양달 사이에서 * 

* 나희덕시집[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