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해남에서 온 편지 - 이지엽

효림♡ 2009. 7. 11. 09:09

* 해남에서 온 편지 - 이지엽 

아홉배미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쿡쿡 쑤신다

아가 서울 가는 인편에 쌀 쪼깐 부친다 비민하것냐만 그래도 잘 챙겨 묵거라 아이엠에픈가 뭔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딸랑하고 지난 설에도 안와부럿다 애비가 알믄 배락을 칠 것인디 그 냥반 까무잡잡하던 낯짝도 인자는 가뭇가뭇하다 나도 얼릉 따라 나서야 것는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이도저도 못하고 안 그러냐. 쑥 한 바구리 캐와 따듬다 말고 쏘주 한 잔 혔다 지랄 놈의 농사는 지먼 뭣 하냐 그래도 자석들한테 팥이랑 돈부, 깨, 콩, 고추 보내는 재미였는디 너할코 종신서원이라니...  그것은 하느님하고 갤혼하는 것이라는디...  더 살기 팍팍해서 어째야 쓸란가 모르것다 너는 이 에미더러 보고 자퍼도 꾹 전디라고 했는디 달구 똥마냥 니 생각 끈하다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 *
 

* 이지엽시집[북으로 가는 길]-고요아침

 

* 겨울우화

고추씨 오쟁이에 바람 한 줄 살금 딛고 가는 겨울 한낮
입 꽝 벌린 장독대 항아리들 금줄에 걸린 햇살들이
 

때 절은 문지방 애써 기어오르다 

고드름 끝에 쨍그랑 부서진다
그러자 직립으로 낙하하는 물방울 그 투명한 속살

그 살결 파고들어 마악 길 떠나려는 찰나

그 밑에서 한가하게 한 세월 좋게 넘어가던 고양이가

그만 그 살가운 파고듦에
밥그릇을 뒤엎고 등을 세우며 부르르 떨고 선다
내게 왔다가 가버린 사랑은 늘 그러하였다

* 이지엽시집[씨앗의 힘]-세계사

 

* 작은 사랑

내 사랑 이런 방(房)이라면 좋겠다
한지에 스미는 은은한 햇살 받아
밀화빛 곱게 익는 겨울
유자향 그윽한

내 사랑 이런 뜨락이라면 참 좋겠다
눈 덮혀 눈에 갇혀 은백으로 잠든 새벽
발자국 누군가 하나
꼭 찍어 놓고간 *

 

* 그릇에 관한 명상  

흙과 물이 만나 한 몸으로 빚어낸 몸
해와 달이 지나가고 별 구름에 새긴 세월
잘 닦인 낡은 그릇 하나 식탁 위에 놓여 있다

 

가슴에 불이 일던 시절인 들 없었으랴
함부로 부딪혀 깨지지도 못한 채
숨 막혀 사려 안은 눈물, 붉은 기억 없었으랴

 

내가 너를 사랑함도 그릇 하나 갖는 일
무형으로 떠돌던 생각과 느낌들이
비로소 몸 가라앉혀 편안하게 잠이 들 듯

 

모난 것도 한 때의 일  둥글게 낮아질 때
잘 익은 달 하나가 거울 속으로 들어오고
한 잔 물 비워낸 자리, 새 울음이 빛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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