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김남조 시 모음

효림♡ 2009. 7. 13. 07:49

* 그대 있음에 - 김남조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마음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삶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 아가(雅歌) 4  
가장 깊은 뿌리에서
아슴히 높은 정수리까지의
내 외로움을
사람아 너에게 드릴 밖엔 없다
동쪽 비롯함에서
서녘 끝 너메까지
한 솔기에 둘러 낀
하늘가락지.
돌고 돌아서
다시 오는 이 마음을 *
 

* 김남조시인[김남조 시 99선]-선

 

* 달밤 

문을 조금 열어주면

너는 어스름 들여다본다

문을 좀더 열어주면

거뭇한 역광으로

안을 내내 들여다본다

 

두 짝 대문 다 열었더니

너는 들어오지 않고

하늘 높이 솟아올라

비단피륙만 드리우네

 

옛날의 사람 하나도

너처럼만 하더니만

제 몸은 아니 오고

피륙 한 필 풀더니만 * 

* 김남조시인[김남조 시 99선]-선

 

* 서시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가 없습니다 

요행이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가 됩시다

 

사랑하던 이를 미워하게 되는 일은
몹시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설혹 잊을 수 없는 모멸의 추억을 가졌다 해도
한때 무척 사랑했던 사람에 대해
아무쪼록 미움을 품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 아침 기도

목마른 긴 밤과
미명의 새벽길을 지나며
싹이 트는 씨앗에게 인사합니다
사랑이 눈물 흐르게 하듯이
생명들도 그러하기에
일일이 인사합니다

주님
아직도 제게 주실
허락이 남았다면
주님께 한 여자가 해드렸듯이
눈물과 향유와 미끈거리는 검은 모발로써
저도 한 사람의 발을
말없이 오래오래
닦아주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엔
이 한 가지 소원으로
기도 드립니다 *

 

* 겨울 바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민음사 

 

* 생 명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에서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 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

* 김남조시집[가난한 이름에게]-미래사 

 

* 편지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을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

* 김남조시집[가난한 이름에게]-미래사 

 

* 밤편지

편지를 쓰게 해다오

이날의 할 말을 마치고
늙도록 거르지 않는
독백의 연습도 마친 다음
날마다 한 구절씩
깊은 밤에 편지를 쓰게 해다오

밤 기도에

이슬 내리는 적멸을
촛불빛에 풀리는
나직히 습한 악곡(樂曲)들을
겨울 침상(枕上)에 적시게 해다오
새벽을 낳으면서 죽어가는 밤들을
가슴 저려 가슴 저려
사랑하게 해다오

세월이 깊을수록
삶의 달갑고 절실함도 더해
젊어선 가슴으로 소리내고
이 시절 골수에서 말하게 되는 걸
고쳐 못쓸 유언처럼 
 

기록하게 해다오
날마다 사랑함은
날마다 죽는 일임을
이 또한
적어두게 해다오

눈 오는 날엔 눈발에 섞여
바람 부는 날엔 바람결에 실려
땅 끝까지 돌아서 오는
영혼의 밤외출도
후련히 털어놓게 해다오

어느 날 밤은
나의 편지도 끝날이 되겠거니
가장 먼

별 하나의 빛남으로
종지부를 찍게 해다오 *

* 김남조시집[가난한 이름에게]-미래사 

 

* 마지막 편지                         
내 마지막 편지는
못 보낸 봉서
사계절 몇 둘레가
젖은 맨발로 이슬 털며 다녀가도
아직 아니라
흰 살결 먹물 문신
옷 벗을 날 그 아니라

실타래 길게 푸는
바람과 햇빛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
처음 물꼬를 트는
강물이
붉은 흙탕물 갈아입고 갈아입어
기어이 수정물빛 되듯이
천만번뇌
다 갚아주고 남는
사람들의 사랑

그 하나의 사연을
여기 담았으되
아직 아니라, 아니라고
봉함 속에
옷깃 여미고 누웠느니

아아 너무나 늙고
영원히 젊은
내 마지막 편지

 

* 내가 흐르는 강물에

구름은
하늘이 그 가슴에
피우는 장미

이왕에
내가 흐르는 강물에
구름으로 친들
그대 하나를 품어가지 못하랴

모든 걸 단번에 거는
도박사의 멋으로
삶의 의미 그 전부를
후회 없이 맡기고 가는
하얀 목선이다

차가운 물살에
검은 머리 감아 빗으면
어디선가 울려오는
단풍나무의 음악

꿈이 진실이 되고
아주 가까이에 철철 뿜어나는
이름 모를 분수

옛날 같으면야
말만 들어도 사랑과 어지럼병
지금은 모든 새벽에 미소로 인사하고
모든 밤에 침묵으로 기도한다

내처 내가 가는 뱃전에
노란 램프로 여긴들 족하리라

이왕에
내가 흐르는 강물에
바람으로 친들
불빛으로 친들
그대 하나를 태워가지 못하랴 *

* 김남조시집[가난한 이름에게]-미래사 

 

* 새벽 외출

영원에서 영원까지
누리의 나그네신 분

간밤 추운 잠을
십자가 형틀에서 채우시고
희부연 여명엔
못과 가시관을 풀어
새날의 나그네길 떠나가시네

이천 년 하루같이
새벽 외출
외톨이 과객으로 다니시며
세상의 황량함
품어 뎁히시고
울음과 사랑으로
가슴 거듭 찢기시며
깊은 밤
십자가 위에 돌아오시어
엷은 잠 청하시느니

아아 송구한 내 사랑은
어이 풀까나
이 새벽에도
빙설의 지평 위를
청솔바람 소리로 넘어가시는
주의 발소리
뇌수에 울려 들리네 *

* 김남조시집[가난한 이름에게]-미래사 

 

* 나무들

보아라

나무들은 이별의 준비로
더욱 사랑하고만 있어
한나무 안에서
잎들과 가지들이
혼인하고 있어
언제나 생각에 잠긴 걸 보고
이들이 사랑하는 줄
나는 알았지

오늘은
비를 맞으며
한 주름 큰 눈물에
온몸 차례로
씻기우네

아아 아름다와라
잎이 가지를 사랑하고
가지가 잎을 사랑하는 거
둘이 함께
뿌리를 사랑하는 거


밤이면 밤마다
금줄 뻗치는 별빛을
지하로 지하로 부어내림을 보고
이 사실을 알았지


보아라 

지순무구

나무들의 사랑을 보아라
머잖아 잎은 떨어지고
가지는 남게 될 일을
이들은 알고 있어
알고 있는 깊이만큼
사랑하고 있어
 *

* 김남조시집[가난한 이름에게]-미래사 

 

* 겨울 그리스도

오늘은
눈 덮인 산야를 거닐으시네
눈같이 흰 옷 입으시고
눈보다 더욱 흰
맨발이시네


그 옛날 물 위를 걸으시던
강줄기도 얼어
유리와 수정의 빙판
바늘 꽂히는 한기(寒氣)의

그 위를 거닐으시네
희디흰 맨발이시네


울고 싶어라
머리칼도 곤두서는
율연(慄然)한 추위에
뭍과 바다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보혈을 섞어 빚은
새봄의 혈액을
한없이 한없이 자아 올리시는
설일(雪日)의 주님 *

* 김남조시인[김남조 시 99선]-선

 

* 섣달 그믐날

새해 와서 앉으라고

의자를 비워주고 떠나는

허리 아픈 섣달 그믐날을

당신이라 부르련다

제야의 고갯마루에서

당신이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길

뚫어서 구멍내는 눈짓으로

나는 바라봐야겠어

 

세상은

새해맞이 흥분으로 출렁이는데

당신은 눈 침침, 귀도 멍멍하니

나와 잘 어울리는

내 사랑 어찌 아니겠는가

 

마지막이란

심오한 사상이다 

누구라도 그의 생의

섣달 그믐날을 향해 달려가거늘

이야말로

평등의 완성이다

 

조금 남은 시간을

시금처럼 귀하게 나누어주고

여윈 몸 훠이훠이 가고 있는 당신은

가장 정직한 청빈이다

 

하여 나는

가난한 예배를 바치노라

* 김남조시집[귀중한 오늘]-시학

 

* 김남조(金南祚)시인  

-1927년 대구 출생   
-1950년 연합신문에 시 [성숙][잔상]-등단, 2007년 만해대상 문학부문 수상

- 시집 [목숨][겨울 바다][설일][평안을 위하여][희망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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