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소포에 들다 - 천양희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수궁(水宮)을
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 ㅡ 바위들이 흔들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
* 천양희시집[직소포에 들다]-문학동네
* 머금다
거위눈별 물기 머금으니 비 오겠다
충동벌새 꿀 머금으니 꽃가루 옮기겠다
그늘나비 그늘 머금으니 어두워지겠다
구름비나무 비구름 머금으니 장마지겠다
청미덩굴 서리 머금으니 붉은 열매 열겠다
사랑을 머금은 자
이 봄, 몸이 마르겠다
* 단추를 채우면서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일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 찾기 같은 것이다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
* 노을 시편
강 끝에 서서 서쪽으로 드는 노을을 봅니다
노을을 보는 건 참 오래된 일입니다 오래되어도 썩지 않는 것은 하늘입니다
하늘이 붉어질 때 두고 간 시들이
생각났습니다 피로 써라 그러면.....생각은
새떼처럼 떠오르고 나는 아무것도
쓸 수 없어 마른 풀 몇개 분질렀습니다
피가 곧 정신이니.....노을이 피로 쓴 시 같아
노을 두어 편 빌려 머리에서 가슴까지
길게 썼습니다 길다고 다 길이겠습니까
그때 하늘이 더 붉어졌습니다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하라.....내 속으로 노을 뒤편이 드나들었습니다
쓰기 위해 써버린 많은 글자들 이름들
붉게 물듭니다 노을을 보는 건 참 오래된 일입니다 *
* 오래된 농담
회화나무 그늘 몇평 받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홥환수 가지끝을 보다
신혼의 첫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 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 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 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그늘보다 더더 깊고 서늘했다
* 2009 서정시학
* 구르는 돌은 둥글다
조약돌 줍다 본다 물속이 대낮 같다
물에도 힘이 있어 돌을 굴린 탓이다
구르는 것들은 모서리가 없어 모서리
없는 것들이 나는 무섭다 이리저리
구르는 것들이 더 무섭다 돌도 한자리
못 앉아 구를 때 깊이 잠긴다 물먹은
속이 돌보다 단단해 돌을 던지며
돌을 맞으며 사는 게 삶이다 돌을
맞아본 사람들은 안다 물을 삼킨 듯
단단해진 돌들 돌은 언제나 뒤에서
날아온다 날아라 돌아, 내 너를
힘껏 던지고야 말겠다
* 운명이라는 것
파도는 하루에 70만번씩 철썩이고
종달새는 하루에 3000번씩 우짖으며 자신을 지킵니다
용설란은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한 꽃대에 3000송이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습니다
벌은 1kg의 꿀을 얻기 위해
560만송이의 꽃을 찾아다니고
낙타는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 우는 새도 있고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새도 있습니다
운명을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요 *
* 천양희시집[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작가
* 한계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 사이로
추위가 몰려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치는
한계령 바람소리.
다 불어 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 *
* 천양희시집[마음의 수수밭]-창비
* 한계
새소리 왁자지껄 숲을 깨운다
누워 있던 오솔길이 벌떡 일어서고
놀란 나무들이 가지를 반쯤 공중에 묻고 있다
언제 바람이 다녀가셨나
바위들이 짧게 흔들한다
한계령이 어디쯤일까
나는 물끄러미 먼 데 산을 본다
먼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누가 터무니없는 말을 했나
먼 것들은 안 돌아오는 길을 떠난 것이다
이제 떠나는 것도
떠나고 싶은 마음보다 흥미가 없다
내 한계에 내가 질렸다
어떤 생을 넘겨도 동어반복이다
언덕길 오르다 말끝을 흐린다
마음아 그만 내려가자
* 오래된 가을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 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 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엽같이
버림받은 기분에 젖은 적이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서 있어 본 적이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더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다
* 천양희시집[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작가
* 마음의 수수밭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 잎 몇 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 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 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
* 천양희시집[마음의 수수밭]-창비
* 하루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
나는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어디서 너마저도
너를 내려놓았느냐
그렇게 했느냐
귀뚜라미처럼 찌르륵대는 밤
아무도 그립지 않다고 거짓말하면서
그 거짓말로 나는 나를 지킨다
* 너에게 쓴다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 진 자리에 잎 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 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生) 풍화되었다. *
*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산 넘어버렸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강 넘어버렸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집까지 갔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걸 위해 다른 것 다 버렸지요
그땐 슬픔도 힘이 되었지요
그 시간은 저 혼자 가버렸지요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었지요
* 이른 봄의 詩
눈이 내리다 멈춘 곳에
새들도 둥지를 고른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웃으며 걸어오고 있다
바람은 빠르게 오솔길을 깨우고
메아리는 능선을 짧게 찢는다
한 줌씩 생각은 돋아나고
계곡은 안개를 길어 올린다
바윗등에 기댄 팽팽한 마음이여
몸보다 먼저 산정에 올랐구나
아직도 덜 핀 꽃망울이 있어서
사람들은 서둘러 나를 앞지른다
아무도 늦은 저녁 기억하지 않으리라
그리움은 두런두런 일어서고
산 아랫마을 지붕이 붉다
누가, 지금 찬란한 소문을 퍼뜨린 것일까
온 동네 골목길이
수줍은 듯 까르르까르르 웃고 있다 *
* 어처구니가 산다
나 먹자고 쌀을 씻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꽃 다 지니까
세상의 三苦가
그야말로 시들시들합니다
나 살자고 못할 짓 했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잘못 다 뉘우치니까
세상의 三毒이
그야말로 욱신욱신합니다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욕심 다 버리니까
세상의 三蟲이
그야말로 우글우글합니다
오늘밤
전갈자리별 하늘에
여름이 왔음을 알립니다
* 가시나무
누가 내 속에 가시나무를 심어놓았다
그 위를 말벌이 날아다닌다
몸 어딘가, 쏘인 듯 아프다
생(生)이 벌겋게 부어오른다. 잉잉거린다
이건 지독한 노역(勞役)이다
나는 놀라서 멈칫거린다
지상에서 생긴 일을 나는 많이 몰랐다
모르다니! 이젠 가시밭길일 끔찍해졌다
이 길, 지나가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라
돌아가지 않으리라
가시나무에 기대 다짐하는 나여
이게 오늘 나의 희망이니
가시나무는 얼마나 많은 가시를
감추고 있어서 가시나무인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나를
감추고 있어서 나인가
가시나무는 가시가 있고
나에게는 가시나무가 있다 *
* 한 아이
시냇물에 빠진 구름 하나 꺼내려다
한 아이 구름 위에 앉아 있는
송사리떼 보았지요
화르르 흩어지는 구름떼들 재잘대며
물장구치며 노는 어린 것들
샛강에서 놀러온 물총새 같았지요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 새끼들
풀빛인지 새소린지 무슨 초롱꽃인지
뭐라고 뭐라고 쟁쟁거렸지요
무엇이 세상에서
이렇게 오래 눈부실까요?
* 나의 라이벌
사는 것이 더 어렵다고 시인은 말하고
산 사람이 더 무섭다고 염장이는 말하네
어렵고 무서운 건 살 때 뿐이지
딱 일주일만 헤엄치고 진흙속에 박혀
죽은 듯이 사는 폐어(肺漁)처럼
죽을 듯 사는 삶도 있을 것이네
세상을 죽으라 따라다녔으나
세상은 내게
무릎 꿇어야 보이는 작은 꽃 하나 심어주지 않았네
인생이 별거야 하나의 룸펜이지 누구는 말하지만
나는 어둠의 한복판처럼 어두워져
생활을 받들 듯
고통을 씀으로써 나를 속죄했네
아무도 사는 법 가르쳐주지 않는데
누구든 살면서 지나가네
삶은 무엇보다 나의 라이벌, 나를 쏘는 벌 *
* 문학수첩 -2009 겨울
* 밥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서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 천양희시인
-1942년 부산 출생
-1965년 현대문학 - [정원(庭園) 한때][화음(和音)][아침]등단, 1996년 소월시문학상,2005년 공초문학상 수상
-시집 [마음의 수수밭][오래된 골목][너무 많은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