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김사인 시 모음

효림♡ 2009. 7. 17. 09:00

* 여름날 - 김사인      

풀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     

* 김사인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 코스모스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

 

* 봄바다 
구장집 마누라

방뎅이 커서
다라이만 했지
다라이만 했지

구장집 마누라는

젖통도 커서
헌 런닝구 앞이
묏등만 했지
묏등만 했지

그 낮잠 곁에 나도 따라
채송화처럼 눕고 싶었지
아득한 코골이 소리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지

미끄덩 인물도 좋은
구장집 셋째 아들로 환생해설랑
서울 가 부잣집 과부하고 배 맞추고 싶었지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민음사 

 

중과부적(衆寡不敵)
조카 학비 몇 푼 거드니 아이들 등록금이 빠듯하다
마을금고 이자는 이쪽 카드로 빌려 내고
이쪽은 저쪽 카드로 돌려 막는다 막자
시골 노인들 팔순 오고 며칠 지나
관절염으로 장모 입원하신다 다시
자동차세와 통신요금 내고
은행카드 대출 할부금 막고 있는데
오래 고생하던 고모 부고 온다 조문하고 막 들어서자
처남 부도나서 집 넘어갔다고
아내 운다
 
'젓가락은 두 자루, 펜은 한 자루.....중과부적!' (노신)
 
이라 적고 마치려는데,
다시 주차공간미확보 과태료 날아오고
치과 다녀온 딸아이가 이를 세 개나 빼야 한다며 울상이다
철렁하여 또 얼마냐 물으니
제가 어떻게 아느냐고 성을 낸다 *

* [시가 내게로 왔다 3]-마음산책

 

*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곱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속처럼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눈에는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 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술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이나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

* 김사인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 오누이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짝 당겨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

* 김사인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적는 것만으로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난 다리만 혼자서 허전하게 남아 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구요?)

안되겠다면 도리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 

* 이성선시인의 [다리] 전문과 [별을 보며] 첫부분을 빌리다.

* 김사인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 전주(全州)
자전거를 끌고
여름 저녁 천변 길을 슬슬 걷는 것은
다소 상쾌한 일
둑방 끝 화순집 앞에 닿으면
찌부둥한 생각들 다 내려놓고
오모가리탕에 소주 한 홉쯤은 해야 하리
그러나 슬쩍 피해가고 싶다 오늘은
물가에 내려가 버들치나 찾아보다가
취한 척 부러 비틀거리며 돌아간다
썩 좋다
저녁빛에 자글거리는 버드나무 잎새들
풀어헤친 앞자락으로 다가드는 매끄러운 바람
(이런 호사를!)
발바닥은 땅에 차악 붙는다
어깨도 허리도 기분이 좋은지 건들거린다
배도 든든하고 편하다
뒷골목 그늘 너머로 오종종한 나날들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그러나 여기는 전주천변
늦여름, 바람도 물도 말갛고
길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버드나무 길
이런 저녁
북극성에 사는 친구 하나쯤
배가 딴딴한 당나귀를 눌러타고 놀러 오지 않을라
그러면 나는 국일집 지나 황금슈퍼 앞쯤에서 그이를 마중하는 거지
그는 나귀를 타고 나는 바퀴가 자글자글 소리내며 구르는 자전거를 끌고

껄껄껄껄껄껄 웃으며 교동 언덕 대청 넓은 내 집으로 함께 오르는 거지
바람 좋은 저녁 *

* 김사인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 옛 일  
그 여름 밤길
수풀 헤치며 듣던
어질머리 풀냄새 벌레소리
발목에 와 서걱이던 이슬방울 그리워요
우리는 두 마리 철없는 노루새끼처럼
몸 달아, 하아 몸은 달아
비에 씻긴 산길만 헤저어 다니고요
단숨만 들여마시고요
안 그런 척 팔만 한번씩 닿아보고요
안 그런 척 몸 가까이 냄새만 설핏 맡아보고요
캄캄 어둠 속에 올려 묶은 머리채 아래로
그대 목덜미 맨살은 투명하게 빛났어요
생채기투성이 내 손도 아름다웠지요

고개 넘고 넘어
그대네 동네 뒷산길
애가 타 기다리던 그대 오빠는 눈 부라렸지만
우리는 숫기 없이 꿈 덜 깬 두 산짐승
손도 한번 못 잡아본걸요
되짚어오는 길엔
고래고래 소리질러 노래만 불렀던걸요 *

* 김사인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 화양연화(花樣年華)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새벽의 물안개처럼 저녁노을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어디론가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짖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누구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는 어느 날부터 누구도 우리를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가가 무르지 눈멀고 귀먼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는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빗속을 어깨 겯고 너희는 떠나

  뒤돌아보지 말고 살아가거라

 

* 늦가을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 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을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린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

* 김사인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두진 시 모음  (0) 2009.07.22
박라연 시 모음  (0) 2009.07.18
천양희 시 모음  (0) 2009.07.15
윤동주 시 모음  (0) 2009.07.13
김남조 시 모음  (0) 2009.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