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계리 - 박라연
가도 가도 산뿐이다가
겨우 몇 평의 감자밭 옥수수밭이 보이면
그 둘레의 산들이 먼저 우쭐거린다
제 몸을 가득 채운 것들을 신의 흔적이다,
라고 믿고 살지만
두 눈으로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사람의 흔적인 옥수수의 흔들림 감자꽃 향기는
왕산(王山)이 본 것 중 가장 귀한 것이다
가도 가도 산뿐이다가
차 파는 오두막집이 보인다
그 주인은 이미 산(山)의 일부이면서
바람의 일부일 것이다
적막 속 어딘가에 집 한 채만 보여도
왕산(王山)은 그 기(氣)를 바꾼다
수십만 평의 산을 거뜬히 먹여 살리는 것은
한 됫박쯤 될까 말까 한
몇 사람의 숨소리일 것이다 *
* 마곡사
탑돌이를 한다. 마음의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 돌아가지 않으리라
해탈문을 지나 천왕문을 지나니 오장육부가 약속처럼 빠져버린
온몸이 물 한 점 없이 텅텅 비어버린, 늙은 살가죽도 반의 반쪽만 남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된다. 그가 올 봄에도 어김없이 피워올린 공중의
새순들은 무엇으로 얻었을까 오늘은 서까래 몇 개라도 올려야 한다
목탁 소리 독경 소리에서 뿜어져나오는 향기
계곡 속의 피라미마저 귀가
쫑긋해져 온갖 교태를 부리며 튀어오른다. 지금 행복하다면 오히려 가슴이
덜켱 내려앉고 지금 힘이 들면 빚을 갚거나 저축을 하는 것처럼 편안해진다
그 마음들 모아서 토담처럼 쌓아올리기 위해 돌고 돌아야 한다. 탑돌이하는
여자 발 밑에 무더기로 피어 있는 새하얀 클로버 꽃장들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행운의 부스러기들이 피운 꽃이라면 기와 몇 장 연등 몇 개조차 바친 적 없지만
이쯤에서 돌아가도 마음의 거처 얻을 수 있으리라
* 가을 화엄사
그리움에도 시절이 있어
나 홀로 여기 지나간다 누군가
떨어뜨린 부스럼 딱지들
밟히고 밟히어서 더욱 더디게 지나가는데
슬픈 풍경의 옛 스승을 만났다
스승도 나도 떨어뜨리고 싶은 것 있어 왔을텐데
너무 무거워서 여기까지 찾아왔을 텐데
이렇게 저렇게 살아온 발바닥의 무늬
안 보이는 발그림자 무게를
내 다 알지 하면서 내려다보는 화엄사의
눈매 아래서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무엇인가
탁탁, 탁탁, 탁탁
모질게 신발을 털며 가벼웁게 지나가려 해도
안 떨어지는 낙엽
화엄사의 낙엽은 무엇의 무게인가
* 입춘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영역까지가
정신이라면
입을 봉하고 싶어도
몽둥이로 두들겨 패주고 싶어도
불가한 것
정신 속에도 사람의 형상이 있다면
눈곱도 떼어내고
칫솔질도 시켜줘야 할 텐데
땀 흘리는 일밖에 떠오르는 게 없어
겨울 내내 미륵산을 오르다가
무슨 선물처럼 전투기를 두 대나 만났다
온몸이 정신인 허공을 가르는 전투기
소리, 미륵산이 쫙쫙 갈라질 때
내 오래된 욕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 여름밤
저 높은 곳에서만 살 수 있는 것들의
빛 냄새 가벼움 묻혀올 수 있을까, 몰라
높은 곳에서 몸 비비고 사는 허공 별빛 달빛
그들은 너무나 가벼워서
정이 숨쉴 틈도 없으면 어쩌지?
갸웃대면서도
그들의 가벼움 그들의 빛 그들의 냄새
그들의 형상을 조금 얻으려고 한여름 밤 내내
심장을 환하게 열고 날아다녔지
돌아와 잠을 청하면
이부자리 가득 쏟아져 내리는 달빛
하루분의 산고(産苦)
금자루 은자루 속에 담아
새벽까지 흔들며 노래 불러주는
그네같은 허공
* 그들의 천성
밥으로 꽃으로 이 세상에 온 것
잊지 말자고
원(願)이 없으니 상처도 없는 것처럼
누구에게라도 즐겁게 바쳐질
맛과 향기와 아름다움을 위해서만
오늘을 걱정하는 저 천성!
빛과 어둠이 정 좋게 산란하는
땅이 좋아서 까맣게 저를 익히는
씨앗들의 저녁
그런 씨앗의 정적을 혹시 아시나요?
* 무화과나무의 꽃
나는 피고 싶다
피어서 누군가의 잎새를 흔들고 싶다
서산에 해지면
떨며 우는 잔가지 그 아픈 자리에서
푸른 열매를 맺고 싶다 하느님도 모르게
열매 떨어진 꽃대궁에 고인 눈물이
하늘 아래 저 민들레의 뿌리까지
뜨겁게 적신다 적시어서
새순이 툭툭 터져오르고
슬픔만큼 부풀어오르던 실안개가
추운 가로수마다 옷을 입히는 밤
우리는 또 얼마만큼 걸어가야
서로의 흰 뿌리에 닿을 수가 있을까
만나면서 흔들리고
흔들린 만큼 잎이 피는 무화과나무야
내가 기도로써 그대 꽃피울 수 없고
그대 또한 기도로써 나를 꽃피울 수 없나니
꽃이면서 꽃이 되지 못한 죄가
아무렴 너희만의 슬픔이겠느냐
피어도 피어도 하느님께 목이 잘리는
꽃, 오늘 내가 나를 꺾어서
그대에게 보이네 안 보이는
안 보이는 무화과나무의 꽃을
* 흰 연못 위의 달 - 회산 백련지
물 위에 씌어지는 혈서
젖어서 읽네 달은
누가 말하는 연(蓮)
문자를 아는 연을 낳았을까
갸우뚱 헛발질하네
사나흘이 수명인데
들리지 않는 읽혀지지 않는
연들의 속내 연들의 젖은 그림자
回山 白蓮池 家家戶戶 만 리 까지
드리워질 때
뼈 속까지 평등한 달
백 만 송이 달이 되어 드높을 때
연꽃인양
달 속에 하얗게 숨는 사람 있네
하루 분의 품 하늘에 올리면서
제 안의 독성
제 안의 품으로 해독시키면서
십 만평 저수지 꽃 세상 만들때
흰 연못 위의 달
피고 지는 저 백일 경(經) 묻혀가고
꽃보다는 더 긴 사람 명(命) 그림자
회산 백련지에 남기게 할 때
돌아가고 싶어
희디흰 네 피속에 숨는 사람 있네
* 생밤 까주는 사람
이 사람아
산 채로 껍질을 벗겨내고
속살을 한번 더 벗겨내고
그리고 새하얀 알몸으로 자네에게 가네
이 사람아
세상이 나를 제아무리 깊게 벗겨놓아도
결코 쪽밤은 아니라네
그곳에서 돌아온 나는
깜깜 어둠 속에서도 알밤인 나는
자네 입술에서 다시 한번
밤꽃 시절에 흐르던 눈물이 될 것이네
* 고사목에 핀 유령
저도 모르게 죽은 감나무
뿌리 뽑히지 않는 것만으로도
유배의 갈피에 피고 지는
나팔꽃 박꽃 능소화 그녀들의
웃음소리만으로도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무슨 이름으로 살았는지 알아주는
이 없지만
아침 낮 저녁이 있기에
유령의 식사만으로도 족히
배부르다
죽은
육체에서도 잎이 흔들리는 것처럼
감나무
배고픈 자리마다 꽃을 피워내는
나팔꽃 박꽃 능소화
노지일수록 눈부신 유령들의 화력!
수혈받고 싶어 길게 목을 빼는
참 비위 좋은 사람의 피가 밴
과실인가
제 묘지로 서서도
단내에 값을 매기다니
* 고사목 마을
피를 빛으로 바꾼 듯
선 자리마다 검게 빛났다
아는 얼굴도 있다
산 채로 벼락을 몇 번쯤 맞으면
피를 빛으로 바꾸는지
온갖 새 울음 흘러넘치게 하는지
궁금한데 입이 안 열렸다
온갖 풍화를 받아들여 돌처럼
단단해진 몸을 손톱으로 파본다
빛이 뭉클, 만져졌다
산 자의 밥상에는 없는 기운으로
바꿔치기 된 듯
힘이 세져서 하산했다
* 상황그릇
품이
간장종지기에 불과한데
항아리에 담을 만큼의 축복이 생긴들
무엇으로 빨아들일까
궁리하다가
추수부터 해보자
넘치면 허공에라도 담아보자 싶어
종지기에 추수한 복을 붓기 시작했다
붓고 또 붓다보니
넘쳐흐르다가
깊고 넓은 가상육체를 만든 양
이미 노쇠한 그릇인데도
상황에 따라 변하기 시작했다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
져줄 때의 형상이 가장 맛, 좋았다
허공에도
마음을 바쳐 머무르니
뿌리 깊은 그릇이 되어
눈부셨다
* 화개(花開)장터
내다 팔 혹은 사들여야 할 약의 내용 궁금해 몸을 여니
봄을 문신하는 저 목련
저 벚꽃 저 들녘 저 섬진강이 헤맬 만큼 헤매다 화개까지 온 그림자들을 업고 있다
당귀 느릅나무 헛개나무열매 칡 꾸지뽕나무
안 팔리는 약재 바라보는 주인들의 시름 물건만 만지작거리다 돌아가는 손님들의
주머니속사정까지 꿀꺽 삼켜버리는 너는 장터의 감초다
배고픔을 사고파는 온갖 먹걸이 파는 주인들 붉게 달구어진 심장을 파는 저 대장간 아저씨
천리향 라일락의 품을 찾아주는 묘목 상 그들은 약의 전도사다
무너질 것 같은 집 담장에 흐드러지게 핀 매화
네가 조금만 늦게 피어났어도
장에 나온 사람들의 숨소리 몇 모금만 늦게 마셨어도 저 외딴집은 숨졌을 것이다
약재는 물론 과즙은 물론 향기는 물론 지상의 외로움
선악(善惡)을 골고루 섭취하는 사람
사람이 가장 용한 약이다
간절히 사 먹고 싶은. *
* 박라연시집[우주 돌아가셨다]-랜덤하우스중앙
-1951년 전남 보성 출생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2008년 윤동주상 수상
-시집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생밤 까주는 사람][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