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고은 시 모음

효림♡ 2009. 7. 27. 08:54

* 그 꽃 -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 별똥 
옳거니 네가 나를 알아보누나 *

 

* 오일장장터

미안하다

미안하다

나 같은 게 살아서 오일장장터에서 국밥을 다 사먹는다 *

 

* 석굴암  

얼마나 많은 밤들이 있었더냐

그 얼마나 많은

바람부는 날들이 있어야 하였더냐

 

천년을 울어

또 천년을 울어

 

여기 찬 돌덩어리 속울음으로

이토록 숭고한 아침 해돋이더냐

 

고개 숙여 흐느끼어라

 

그 언젠가 그대 여기 앉아

환히 환히 달 떠오르리라 *

 

* 눈물

*序
아 그렇게도 눈물 나니라
한 줄기의 냇가를 들여다보면
나와 거슬러 오르는 잔 고기떼도 만나고
그저 뜨는 마름풀 잎새도 만나리라
내 늙으면, 어느 냇가에서

지난 날도 다시 거슬러 오르며 만나리라
그러면 나는 눈물 나리라

 

*누이에게 

이 세상의 어디에는  

부서지는 괴로움도 있다 하니 

너는 그러한 데를 따라가 보았느냐 

물에는 물소리가 가듯 

네가 자라서 부끄러우며 울 때 

나는 네 부끄러움 속에 있고 싶었네 

아무리 세상에는 찾다 찾다 없이도 

너를 만난다고 눈 멀으며 쏘아다녔네 

늦봄에 날 것이야 다 돋아나고  

무엇이 땅 속에 남아 괴로와 할까 

저 夜摩天에는 풀 한 포기라도 돋아나 있는지 

이 세상의 어디를 다 돌아다니다가 

해 지면 돌아오는 네 울음이요 

울 밑에 풀 한 포기 나 있는 것을 만나도 

나는 눈물이 나네 *

* 김용택[시가 내게로 왔다]

 

문의마을에 가서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어느 죽음만큼

이 세상의 길이 아득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소백산맥 쪽으로 뻗어간다. 

그러나 구비구비 삶은 길을 에돌아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고 서서 견디노라.

먼 산이 너무 가깝다.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꽉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무덤으로 받는 것을.

끝까지 참은 뒤 

죽음은 이 세상의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지난 여름의 부용꽃인듯

어쩌면 가장 겸허한 정의인 듯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은 다음 우리 모두 다 덮을 수 있겠느냐. *

* 신경림엮음[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글로세움

 

*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 온 울음이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아니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嫩葉)이나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
너무나 교조적인 삶이었으므로 미풍에 대해서도 사나웠으므로 
 

얼마 만이냐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십여 년 만에 강렬한 곳이다


강렬한 이 경건성! 이것은 나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을 내 벅찬 가슴은 벌써 알고 있다
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 버렸다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자작나무의 천부적인 겨울과 함께
깨물어먹고 싶은 어여쁨에 들떠 누구네의 어린 외동딸로 자라난다 

 

나는 광혜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등지고 삭풍의 칠현산 험한 길로 서슴없이 지향한다 * 

 

* 산수유꽃

그래도 괜찮단 말인가
무슨 천벌로
얼지도 못하는 시꺼먼 간장이란 말인가
다른 것들 얼다가 풀리다가
으스스히
빈 가지들
아직 그대로
그러다가 보일 듯 말 듯
노란 산수유꽃
여기 봄이 왔다고
여기 봄이 왔다고
돌아다보니
지난해인 듯 지지난해인 듯
강 건너 아지랑이인가

 

* 삶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 

 

* 머슴 대길이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 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때 늦어도 투덜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 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그러나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 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을 주룩주룩 비 오듯 읽었지요

어린아이 세상에 눈떴지요

일제 36년 지나간 뒤 가갸거겨 아는 놈은 나밖에 없었지요

 

대길이 아저씨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홑적삼 큰아기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 하고

지게 작대기 뉘어 놓고 먼 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나도 따라 바라보았지요

우르르르 달려가는 바다 울음소리 들었지요

찬 겨울 눈더미 가운데서도

덜렁 겨드랑이에 바람 잘도 드나들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새우는 불빛이었지요 *

 

* 눈길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寞)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

 

* 奢侈  

어린 시절, 고향 바닷가에서 자주 초록빛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빨랫줄은 너무 무거웠고 빨래가 날아가기도 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오랜 병(病)은
착한 우단 저고리의 누님께 옮겨갔습니다
아주 그 오동(梧桐)꽃의 폐장(肺臟)에 묻혀 버리게 되었습니다
누님은 이름 부를 남자가 없었고
오직 '하느님!' '하느님!'만을 불렀습니다
저는 파리한 채, 누님의 혈맥(血脈)은 갈대밭의 애내로 울렸습니다
이듬해 봄이 뒤뜰에서 살다 떠나면
어쩌다 늦게 피는 꽃에 봄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윽고 여름 한동안 저는 흙을 파먹고 울었습니다
비가 몹시 내렸고 마을 뒤 넓은 간석농지(干潟農地)는 홍수에 잠겼습니다
누님께서 더욱 아름다왔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

 

찬 세면(洗面) 물에 제 푸른 이마 주름이 떠오르고
그 수량(水量)을 피해 가을에는 하늘이 서서 우는 듯했습니다
멀리 기적(汽笛)소리는 확실하고 그 뒤에 가을은 깊었습니다
모조리 벗은 나무에 몇 잎새만 붙어 있을 때
누님은 그 잎새들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맑은 뜰 그 땅 밑에서 뿌리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더 푸르기 때문에 제 눈 빠는 버릇이 자고
그러나 어디선가 제 행선지(行先地)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누님께서 기침을 시작한 뒤 저는 급격하게 적막하였습니다
차라리 제 턱을 치켜들어 보아도
다만 제 발등은 노쇠(老衰)로 복수(復讐)받았습니다
마침내 제가 참을 수 없게 누님은 피를 쏟았습니다
한 아름의 치마폭으로 고히는 그것을 껴안았습니다
그때 저는 비로소 보았습니다, 누님의 깊은 부끄러움을

 

그리고 그 동정(童貞) 안에 내숙(內宿)한 조석(潮汐)을
그 뒤로 저의 잠은 누님의 잠이었습니다
누님의 내실(內室)에는 어떤 고막(鼓膜)이 가득 찼고
저는 문 밖에서 순한 밤을 한 발자국씩 쓸었습니다
누님께서 우단 저고리를 갈아입던 날
저는 누님의 황홀한 시간을 더해서
겨울 바닷가를 헤매이다가 돌아왔습니다
이듬해 봄의 음력(陰曆), 안개 묻은 빨랫줄을 가리키며
누님의 흰 손은 떨어지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울지 않고 그의 흰 도자(陶磁) 베개 가까이 누워
얼마만큼 그의 혼을 따라가다 왔습니다
 

* 고은시전집-민음사

 

* 낯선 곳 

떠나라 낯선 곳으로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그대 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
단 한 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그대 떠나라 아기가 만들어낸 말의 새로움으로
할머니를 알루빠라고 하는 새로움으로 그리하여 할머니조차 새로움이 되는 곳 그 낯선 곳으로
떠나라 그대 온갖 추억과 사전을 버리고 빈주먹조차 버리고
떠나라 떠나는 것이야말로 그대의 재생을 뛰어넘어 최초의 탄생이다 떠나라 *

* 고은시집[내일의 노래]-창비

 

* 선술집

기원전 이천년쯤의 수메르 서사시 '길가메시'에는 

주인공께서

불사의 비결을 찾아나서서 

사자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하늘에서 내려온 

터무니없는 황소도 때려잡고 

땅끝까지 가고 갔는데// 

그 땅끝에 

하필이면 선술집 하나 있다니!// 

그 선술집 주모 씨두리 가라사대// 

손님 술이나 한잔 드셔라오 

비결은 무슨 비결 

술이나 한잔 더 드시굴랑은 돌아가셔라오// 

정작 그 땅끝에서

바다는 아령칙하게 시작하고 있었다 

어쩌냐 * 

* 고은시집[허공]-창비

 

* 전등사 

강화 전등사는 거기 잘 있사옵니다

옛날 도편수께서

딴 사내와 달아난

온수리 술집 애인을 새겨

냅다 대웅전 추녀 끝에 새겨놓고

네 이년 세세생생

이렇게 벌 받으라고 한

그 저주가

어느덧 하이얀 사랑으로 바뀌어

흐드러진 갈대꽃 바람 가운데

까르르

까르르

서로 웃어대는 사랑으로 바뀌어

거기 잘 있사옵니다 *  

 

* 허공

누구 때려죽이고 싶거든 때려죽여 살점 뜯어먹고 싶거든
그 징그러운 미움 다하여
한자락 구름이다가
자취없어진
거기
허공 하나 둘
보게
어느날 죽은 아기로 호젓하거든
또 어느날
남의 잔치에서 돌아오는 길
괜히 서럽거든
보게
뒤란에 가 소리 죽여 울던 어린시절의 누나
내내 그립거든
보게
저 지긋지긋한 시대의 거리 지나왔거든
보게
찬물 한모금 마시고 나서
보게
그대 오늘 막장떨이 장사 엔간히 손해보았거든
보게
백년 미만 도(道) 따위 통하지 말고
그냥 바라보게

거기 그 허공만한 데 어디 있을까보냐 *

* 고은시집[허공]-창비

 

* 高銀시인

-1933년 전라북도 군산 사람

-19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1974년 한국문학작가상,1988년 만해문학상,2008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시집 [피안감성][고은시 전집][만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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