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김광규 시 모음

효림♡ 2009. 7. 29. 08:08

* 달팽이의 사랑 - 김광규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둘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

* 김광규시집[좀팽이처럼]-문학과지성사

 

* 영산(靈山) 
내 어렸을 적 고향에는 신비로운 산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靈山이었다.

靈山은 낮에 보이지 않았다.
산허리까지 잠긴 짙은 안개와 그 위를 덮은 구름으로 하여, 靈山은 어렴풋이 그 있는 곳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靈山은 밤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 없이 맑은 밤하늘 달빛 속에 또는 별빛 속에 거무스레 그 모습을 나타내는 수도 있지만, 그 모양이 어떠하며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靈山을 불현듯 보고 싶어.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이상하게도 靈山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이미 낯선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산은 이곳에 없다고 한다. *
 

 

* 나뭇잎 하나  

크낙산 골짜기가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미처 몰랐었다 

 

뒷절로 가는 길이 온통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고 나뭇잎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지던 때

그러니까 낙엽이 지던 때도

그곳을 거닐면서 나는

느끼지 못했었다 

 

이렇게 한 해가 다 가고

눈발이 드문드문 흩날리던 날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

문득 혼자서 떨어졌다 

 

저마다 한 개씩 돋아나

여럿이 모여서 한여름 살고

마침내 저마다 한 개씩 떨어져

그 많은 나뭇잎들

사라지는 것을 보여 주면서

 

* 상행(上行)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平澤)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느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거리는 TV 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다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귀기울이지 말아다오
확성기마다 울려 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옛부터 인생은 여행에 비유되었으니
맥주나 콜라를 마시며
즐거운 여행을 해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아!]라고 말해다오
보다 긴 말을 하고 싶으면 침묵해다오
침묵이 어색할 때는
오랫동안 가문 날씨에 관하여
아르헨티나의 축구 경기에 관하여
성장하는 GNP와 증권 시세에 관하여
이야기해다오
너를 위하여
그리고 나를 위하여

 

* 어느 가을 날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골목길 행인들의 눈길을 끌고
동네 사람들이 탐내던
우리집 감나무
큰 가지가 어느 가을 날
뚝 부러졌다
주황색으로 익어 가는 그 탐스런
열매들의 무게 때문에

 

* 가을날
누가 부는지 뒷산에서
서투른 나팔 소리 들려온다
견딜 수 없는 피로 때문에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그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여름내 햇볕 즐기며
윤나는 잎사귀 반짝이던 감나무에
지금은 까치밥 몇 개
높다랗게 매달려 있고
땅에는 떨어진 열매들
아무도 줍지 않았다
나는 어디쯤 떨어질 것인가
낯익은 골목길 모퉁이
어느 공원 벤치에도 이제는
기다릴 사람 없다
차라리 늦가을 벌레 소리에 묻혀
지난날의 꿈을 꾸고
꿈속에서 깨어나
손짓하는 코스모스에게 묻고 싶다
봄에는 너를 보지 못했다
여름에는 어디 있었니
때늦게 길가에 피어난 꽃들
함초롬히 입 가리고 웃을 것이다
아직도 누군가 만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
굳게 입 다물고
두꺼운 안경으로 눈 가리고
앓고 싶지 않은 병
온몸에 간직한 채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가고 있다
아득한 젊은 날을 되풀이하는
서투른 나팔 소리
참을 수 없는 졸음 때문에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그의 말을 이제는 알 것 같다 *

 

* 좀팽이처럼

돈을 몇 푼 찾아가지고
은행을 나섰을 때 거리의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대출계 응접 코너에 앉아 있던
그 당당한 채무자의 모습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신촌 일대를 지나갈 수 없었다
인조대리석이 반들반들하게 깔린
보도에는 껌자국이 지저분했고
길 밑으로는 전철이 달려갔다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시뻘건 바위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지진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지
5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의 한 귀퉁이
1,000만 시민이 들끊고 있는
서울의 한 조각
금고 속에 넣을 수 없는
이 땅에 그 부동산업자가
소유하고 있었다 마음대로 그가
양도하고 저당하고 매매하는
그 땅 위에서 나는 온종일
바둥거리며 일해서
푼돈을 벌고
좀팽이처럼
그것을 아껴가며 살고 있었다

 

* 늙은 소나무

새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자연보호를 받고 있는 

늙은 소나무
시원한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의 몸짓 보여주며
백여 년을 변함없이 너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송진마저 말라버린 몸통을 보면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 하고 회원들은
시멘트로 밑둥을 싸 바르로
주사까지 놓으면서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도
늙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
오래간만에 털썩 주저앉아 너도
한 번 쉬고 싶을 것이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기에
몇백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너의 졸음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백여 년 동안 뜨고 있던
푸른 눈을 감으며
끝내 서서 잠드는구나
가지마다 붉게 시드는 

늙은 소나무 *  

 

* 저녁나절

썰물이 빠진 뒤 

뭍으로 길게 닻을 던진 채

개펄 바닥에 주저앉아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는 거룻배들

정물로 머무는 동안 소금의

하얀 발자국 조금씩 드러날 때

말나루 먼 바다에서 아련히

밀물 들어오는 소리

갈대숲 어느새 물에 잠기고

물새들 날카롭게 지저귀고

잠에서 깨어난 거룻배들

물 위로 떠오르고

황혼의 냄새 불그스레 번져갈 때

조약돌처럼 널린 땅 위의 기억들

적시며 밀려오는 파도

어두워가는 여생의 하루 *

* 땅거미 내릴 무렵   

짙푸른 여름 숲이 깊어갑니다

텃새들의 저녁 인사도 뜸해지고

골목의 가로등 하나 둘 켜질 때

모기들 날아드는 마당 한구석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밀려오는 어둠에 잠깁니다

어둠이 스며들며 조금씩

온몸으로 퍼져가는 아픔과 회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지긋이 견딥니다 남은 생애를

헤아리는 것 또한 나에게 주어진

몫이려니 나의 육신이

누리는 마지막 행복이려니

그저 이렇게 미루어 짐작하고

땅거미 내릴 무렵

마당 한구석에 나를 앉혀 둡니다

차츰 환해지는 어둠 속에서

한 점 검은 물체로 내가

멀어져 갈 때까지 *

* 김광규시집[시간의 부드러운 손]-문학과지성사

 

* 때  

남녘 들판에 곡식이 뜨겁게 익고

장대 같은 빗줄기 오랫동안 쏟아진 다음

남지나해의 회오리바람 세차게 불어와

여름내 흘린 땀과 곳곳에 쌓인 먼지

말끔히 씻어갈 때

앞산의 검푸른 숲이 짙은 숨결 뿜어 내고

대추나무 우듬지에 한두 개

누르스름한 이파리 생겨날 때

광복절이 어느새 지나가고

며칠 안 남은 여름 방학을

아이들이 아쉬워할 때

한낮의 여치 노래 소리보다

저녁의 귀뚜라미 울음 소리 더욱 커질 때

가을은 이미 곁에 와 있다

여름이라고 생각지 말자

아직도 늦여름이라고 고집하지 말자

이제는 무엇인가 거두어들일 때 *

 

* 안개의 나라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 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 김광규(金光圭)시인 

-1941년 서울 출생  
-1975년 [문학과 지성]시[유무][영산][시론] 발표, 1981년 녹원문학상-오늘의작가상, 1984년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반달곰에게][좀팽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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