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이영광 시 모음

효림♡ 2009. 7. 30. 08:06

         

* 숲 - 이영광   

나무들은 굳세게 껴안았는데도 사이가 떴다 뿌리가 바위를 움켜 조이듯 가지들이 허공을 잡고 불꽃을 튕기기 때문이다 허공이 가지들의 氣合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손아귀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리가 없다 껴안는다는 것은 또 이런 것이다 가여운 것이 크고 쓸쓸한 어둠을 정신없이 어루만져 다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글거리는 포옹 사이로 한 부르튼 사나이를 有心히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필경은 나무와 허공과 한 사나이를, 딱따구리와 저녁 바람과 솔방울들을 온통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구멍 숭숭 난 숲은 숲字로 섰다 숲의 단단한 골다공증을 보라 껴안는다는 것은 이렇게 전부를 다 통과시켜주고도 제 자리에,  

고요히 나타난다는 뜻이다 *

* 이영광 시집[그늘과 사귀다]-랜덤하우스

 

* 탁본   

평안하다는, 서신 받았습니다

평안했습니다

 

아침이 너무 오래 저 홀로 깊은

동구까지 느리게 걸어갔습니다

앞강은 겨울이 짙어 단식처럼 수척하고

가슴뼈를 단단히 여미고 있습니다

 

마르고 맑고 먼 빛들이 와서 한데

어룽거립니다

당신의 부재가 억새를 흔들고

당신의 부재가 억새를 일으켜 세우며

강심으로 세차게 미끄러져 갔습니다

 

이대로도 좋은데, 이대로도 좋은

나의 평안을

당신의 평안이 흔들어

한 겹 살얼음이 깔립니다

 

아득한 수면 위로

깨뜨릴 수 없는 금이 새로 납니다

물 밑으로 흘러왔다

물 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

흰 푸른 가슴 뼈에

탁본하듯 

* 이영광 시집[그늘과 사귀다]-랜덤하우스 

 

* 절 1 
늙은 몸은 절하기 위해 절에 온다
절 가지고 될 일도 안 될 일도 있고
절 없이도 일은 되기도 안 되기도 하는 것인데
그저 모든 걸 다 들어 바치는 절은
내가 받는 듯, 난감하다
온몸으로 사지를 구부리고
두 손으로 그 힘을 받쳐 올렸다가
다시 통째로 제자리에 내려놓은 절
성한 데 없는 늙은 뼈가 웅웅
또 저만 빼고, 일문의 안녕을 엎드려 비는데
나는 그만 절을 피해
배롱나무 아래로 들어간다
늙은 나무가 가득히 피워 놓은 붉은 꽃들
또한 절하는 자세여서
절 안에서 내다보면
그늘 밖에는 햇빛이 타는 어지러운 한세상이
꽃잎에 싸여 엎드린 아름다운 몸이, 있다
결정적인 일은 다 절 가지고는 안 되었는데
몸은 아직 더 결정적인 일이 남아 있다는 거다
몸은 무너졌다가는 다시 일어나고
무너졌는데도 결코 무너지는 법이 없다
아, 꽃잎은 그런 당신을 끝없이 적신다
어머니 뼈는 저 자세에서 가장 단단하고 구멍 없다
저 자세는 몸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내가 절하고 싶은 몸이 왜 당신뿐인지 알겠다
수없이 많은 절 이미 받고 꽃그늘 아래
헤롱헤롱 두 발로 잘 서 있음도 알겠다

 

* 직선 위에서 떨다

孤雲寺 가는 길
산철쭉 만발한 벼랑 끝을
외나무다리 하나 건너간다
수정할 수 없는

직선이다

너무 단호하여 나를 꿰뚫었던 길
이 먼 곳까지
꼿꼿이 물러나와
물 불어 계곡 험한 날
더 먼 곳으로 사람을 건네주고 있다
雜木 숲에 긁힌 한 인생을
엎드려 받아주고 있다

문득, 발 밑의 격량을 보면
두려움 없는 삶도
스스로 떨지 않는 직선도 없었던 것 같다
오늘 아침에도 누군가 이 길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나갔던 거다 *

* 이영광시집[직선 위에서 떨다]-창비

 

문(門)
가지 말아야 했던 곳
범접해서는 안 되었던 숱한 內部들
사람의 집 사랑의 집 세월의 집
더럽혀진 발길이 함부로 밟고 들어가
지나보면 다 바깥이었다


날 허락하지 않는 어떤 내부가 있다는 사실,
그러므로 한 번도 받아들여진 적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나는 지금
무엇보다도, 그대의 텅 빈 바깥에 있다


가을 바람 은행잎의 비 맞으며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닿아서야
그곳에 단정히 여민 門이 있었음을 안다 *

* 이영광시집[직선 위에서 떨다]-창비

 

* 순대  

순대 전문점 가스불 위에서 김 뿜는 순대덩이를
뼈 잃은, 짐승의 생식기 같기도 하고
어린 시절, 뽐뿌로 바람을 넣으면
탱탱하게 부풀어오르던
빵꾸 때운 자전거 튜브 같기도 하다
저 속으로 꿀꿀이죽이 쏟아져 들어가
용적을 늘리고 간과 불알을 키워도
결국 텅 비어 쭈글쭈글한 주름 주머니
아니겠는가 아래를 묶었던 허기가
풀리면 와르르 새버리는 구멍
저 안은 공(空)인가 색(色)인가
금욕처럼 조용한 오후 세시
순대집 아줌마, 고무 다라이에 가득한 내장을
고무장갑으로 주무르고
순대 주세요
저는 허기로 밑을 꽉 조인 구멍이예요,
물론 조금 있으면 또 헤벌어지겠지만요
나는 순대를 소금에 찍어 입에 넣는다
빵꾸난 길다란 순대 속으로

 
* 빙폭(氷瀑) 1 
서 있는 물
물 아닌 물
매달려
거꾸로 벌받는 물,  
무슨 죄를 지으면
저렇게 투명한 알몸으로 서는가
출렁이던 푸른 살이
침묵의 흰 뼈가 되었으므로
폭포는 세상에 나가지 않는다
흘려보낸 물살들이 멀리 함부로 썩어

아무것도 기르지 못하는 걸 폭포는 안다 *

* 이영광시집[직선 위에서 떨다]-창비

  

* 동해  

내 여자는 동해 푸른 물과 산다.

탁류와 해초들이 간간이 모여

이룩하는 근해의 평화를 꿈꾸지 않는다.

저녁마다 아름다운 생식기를 씻어 몸에 담고

한층 어렵게 밝아오는 먼 수평까지 헤엄쳐 나가

아침이면 내 여자는 새 바다를 낳는다

살을 덜어 나의 아들을 낳는다.

내가 이 세상의 홀몸 이기지 못해

천리 먼 길 절뚝여 찾아가면

철책 너무 투명한 슬픔의 알몸을 흐느끼며

문득 캄캄한 밤바다 되어 말 못하게 한다

다시는 여기 살러 오지 말라 한다. *

*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창비300 

 

* 물불

1억 5천만 km를 날아온 불도 엄연한 불인데

햇빛은 강물에 닿아도 꺼지질 않네

물의 속살에 젖자 활활 더 잘 타네

물이 키운 듯 불이 키운 듯한 버드나무 그늘에 기대어

나는 불인 듯 물인 듯도 한 한 사랑을 침울히 생각하는데

그 사랑을 다음 생까지 운구(運柩)할 길 찾고 있는데

빨간 알몸을 내놓고

아이들은 한나절 물속에서 마음껏 불타네

누구도 갑자기 사라지지 않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것이

저렇게 미치는 것이 좋겠지

저 물결 다 놓아 보내주고도 여전한 수량(水量)

태우고 적시면서도 뜯어말릴 수 없는 한 몸이라면

애써 물불을 가려 무엇하랴

저 찬란 아득히 흘러가서도 한사코 찬란이라면

빠져 죽든 타서 죽든

물불을 가려 무엇하랴

*노작문학상 수상작품

 

* 고사목 지대  

죽은 나무들이 씽씽한 바람소릴 낸다

죽음이란 다시 죽지 않는 것

서서 쓰러진 그 자리에서 새로이

수십 년씩 살아가고 있었다 

 

사라져 가고

숨져 가며

나아가고 있었다 

 

유지를 받들 듯

산 나무들이 죽은 나무들을 인정해 주고 있었다 

 

정상 부근에서는 생사의 양상이 바뀌어

고사목들의 희고 검은 자태가 대세를 이룬 가운데

슬하엔 키 작은 산 나무들 젖먹이처럼 맺혔으니 

 

죽은 나무들도 산 나무들을 깊이

인정해 주고 있었다 

 

나는 높고 외로운 곳이라면 경배해야 할 뜨거운 이유가 있지만

구름 낀 생사의 혼합림에는

지워 없앨 경계도 캄캄한 일도양단도 없다 

 

판도는 변해도 생사는

상봉에서도 쉼 없이 상봉 중인 것

여기까지가 삶인 것 

 

죽지 않는 몸을 다시 받아서도 더 오를 수 없는

이곳 너머의 곳, 저 영구 동천에 대하여

내가 더 이상 네 숨결을 만져 너를 알 수 없는 곳에 대하여

무슨 신앙 무슨 뿌리 깊은 의혹이 있으랴 

 

절벽에서 돌아보면

올라오던 추운 길 어느 결에 다 지우는 눈보라

굽이치는 능선 너머 숨죽인 세상보다 더 깊은 신비가 있으랴

*노작문학상 수상작품

 

* 독방  

혼자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나는 믿었지만

행복 속에 안녕이 없네 

 

나는야 뭉게구름 같은 숲 가녘에

안내인마냥 외따로 선

키 큰 소나무 한 그루 사랑했지만

그 나무 오징어 다리 같은 뿌리 내놓고 길게 쓰러졌네 

 

혼자 있는 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

한마디도 하지 않는 자

무엇이든 저지르고 마는 자이네 

 

그의 몸은 그의 몸 이기지 못해

일어나지 않는 몸

기필코 자기를 해치는 몸이네 

 

이 독방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독방

현관문 열고

방문 열고 들어서면

더 들어갈 데가 없는 곳에

그러나 더 열고 들어가야 할 문 하나가 어디엔가

반드시 숨어 있을 것 같은 곳에 

 

쓰러지지 않고

침묵하지 않고

기어 다니지 않아도 되는

더 단단한 독방 하나, 나는 믿었지만 

 

그 꿈 같은 감옥

불 켜면 빛 속으로 사라지고

지금, 타는 듯한 벌판에서 눈 감는 사람은

또 다시 문 밖에 누워 잠드는 사람이네

*노작문학상 수상작품

 

* 현기증  

마흔, 어디선가 누가 지금 나를 완전히

포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고뇌에 찬 결단이기를 빈다

밥 먹다 말고 화장실 갔다 와서

다시 숟가락 집어드는 사람은 지금 제 인생이

너덜너덜해졌다고 깊이 느꼈다, 느꼈을까

내면이란 게 상(傷)하게 되어 있는 거지만 그곳으로

먹는다는 건 안으로 토한다는 것, 근데 왜 멎질 않지

흉터를 몸에 남기고 간 것들조차 믿을 수 없고

머리가 빠진다, 사람 같지 않던 그 독재자처럼

아니 그자와는 아무 관계없이 온 미래일 뿐이다

미래란 늘 난장판이었지만

미래라고 하면 두근거리며 현관에 다가선 발소리가 떠오르지만

내가 노후를 걱정하지 않는 걸 보면

나에게도 분명 노후가 있을 것이다

죽음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쉼 없이 중얼거렸던 자는

무시무시한 방랑과 영웅적인 은둔에 대해

약간 병적인 선호를 가진 자

누가 광인보다 더 진실되겠는가

누가 소외되지 않기 위해 칩거한 자의 말을 듣겠는가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은 반드시 우릴 후회하게 하고

후회하고 있다는 건 이미 실패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세상에 적개심을 가져선 안 돼

누구의 세상도 아니니까

나는 어떻게든 무사히 여길 빠져 나가고 싶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는데 모두가 떠난 듯한 곳에서

114 안내원은 사랑합니다 고객님, 하고 별안간 고백했다

사랑은 도처에서 좀비처럼 나타난다

그건 언제나 정신이 좀 없지

하지만 사랑을 사랑해

시는 시인을 죽인다는 말 가지고는 이제 행복해지지 않아

날 갖고 더는 실험하지 않을 거야

나가려면 인정해야 한다. "나는 당신이랑 같아."

자백에는 자백 몰래 끼워 넣은 유언(遺言) 냄새가 나지

저 티브이가 내게 뭔가를 끊임없이 개인 교습하듯

테이크 다운 이후의 그라운드 공방에서 포옹한 두 격투가는

연애하는 자세로 죽어라 치고받고

제 신(神)에게 제 나라를 부동산으로 바치려는 자가 파안대소하고 있고

터미네이터는 소방차 앞에서 재난 선포나 하고

그리고, 느닷없이 옷을 바꿔 입고 나타난 하프타임의 치어걸들을

나는 멍한 눈으로 본다

그래도 사는 것에는 사는 것 이상(以上)의 뭔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

구름모자 쓴 15층 옥상 위로 섬광처럼 새들이 날아갔다

수치심으로 빨갛게 몸을 데우는 저녁나무 밑에는

너무 가까워 폴짝, 뛰어내리고 싶은 지상(地上)이 있다

비닐 같은 비늘을 벗어 놓고 어마어마한 짐승이 지나갔을 것이야

그러한 뿌연 공기 사이로

또 그러한 현기증 사이로

개를 안고 비비고 핥으면서 식후의 여자들이 지나간다

제 몸으로 그것을 낳기라도 했다는 듯

그러나 이것은 다만 휴일의 흐릿한 풍경 풍경

커튼을 내리면 사라져 버릴 것들

애들은 절대로 미치지 않아요

출혈하고 돌아온 몸이 뭔가를 토하려고 다시

털썩, 식탁에 주저앉았을 때부터

너무 멀고 어지러운 바깥을 향해 나에게는

약간의 연기(演技)가, 이를테면 고요한 몸부림이 필요했다

아무리 더러운 것도 만지고 빨고 껴안고 싶은 순간이 온다

술잔에 물든 사양(斜陽) 흔들리다 꺼지면

창밖의 어둠, 천천히 걸어 안으로 들어온다

*노작문학상 수상작품

 

* 시인들   

어딘가 아픈 얼굴들을 하고 시인들이 앉아 있다

막 입원한 듯 막 퇴원한 듯 위중해도 보인다

암 투병 중인 여류시인 문병 갔다가 걸어서 연말 술자리에 갔더니

울긋불긋한 선거 현수막이 만장같이 나부끼더니

얼음장 아래 모인 한 됫박의 마른 물고기들처럼

오직 시인들끼리, 시인들이 모여 있다

자리에 앉았는데도 멀리 떠난 얼굴을 한 아픔도 있고

어디든 너무 깊이 들어앉아 칼끝처럼 자기를 잊은 아픔도 있다

면도로 민 머리에 예쁜 수건을 쓴 마른 몸이 생각났다

젖과 자궁을 들어내고 젊은 죽음 냄샐 풍기는 몸들이 생각났다

아픈 그녀의 자리는 여기 없고

그녀는 이곳보다 더 춥고 어두운 들판을 걸어가고 있고, 시인들이

이름 부르면 끌려 나가야 할 인질들처럼 모여 있다

많은 것을 버렸는데도 아직 더 버릴 게 있다는 얼굴들이다

별로 얻은 게 없는데도 별로 얻을 게 없다는 표정들이다

시인들은 영원히 딴 곳을 보고 있다

무섭게 아프고 무섭게 태연하다

간혹 한눈팔지 않는, 사촌 같은 아픔도 끼여 있는데

병을 흉내 내는 것이 더 큰 병임을 알기에

모르는 척 속은 듯 함께 앓아 넘기기도 한다

나는, 여기 머물면서도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사람들이 좋다

이상(異常)한 것에 정신없이 끌리는 사람들이 좋다

제가 아픈지 안 아픈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좋다

처음부터 지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좋다

마음 가난과 어지러움은 면허 같은 것이니 길이 보전들 하시되

내년에도 몸이나, 어떻게든 몸 하나만은 잘들 보살피시라고

나는 조등(弔燈)처럼 노랗게 취하며 기원했다

얼음 물고기들이 순한 주둥이를 뻐끔대며 옹송그리는

차디찬 환영이 나무 벽 위로 자꾸 지나갔다

진통제를 꽂고도 시 읽고 시 읽어 달라던 안 아픈 영혼

아직 시집 한 권 낸 적 없는 그녀 생각이 났다

*노작문학상 수상작품

 

* 이영광(李永光)시인  

-1967년 경북 의성 출생

-1998년 문예중앙에 [빙폭] 등 10편을 발표,  2008년 노작문학상 수상
-시집 [그늘과사귀다][직선위에떨다][물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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