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은 간다 -진달래 - 김용택
염병헌다 시방, 부끄럽지도 않냐 다 큰 것이 살을 다 내놓고 훤헌 대낮에 낮잠을 자다니
연분홍 살빛으로 뒤척이는 저 산골짜기
어지러워라 환장허것네
저 산 아래 내가 쓰러져불겄다 시방 *
* 봄날은 간다 -찔레꽃
내가 미쳤지 처음으로 사내 욕심이 났니라
사내 손목을 잡아끌고
초저녁
이슬 달린 풋보릿잎을 파랗게 쓰러뜨렸니라
둥근 달을 보았느니라
달빛 아래 그놈의 찔레꽃, 그 흰빛 때문이었니라 *
* 봄날은 간다 -산나리
인자 부끄럴 것이 없니라
쓴내 단내 다 맛보았다.
그러나 때로 사내의 따뜻한 살내가 그리워
산나리꽃처럼 이렇게 새빨간 입술도 칠하고
손톱도 청소해서 붉은 매니큐어도 칠했니라
말마라
그 세월
덧없다 *
* 봄날은 간다 -서리
꽃도 잎도 다 졌니라 실가지 끝마다 하얗게 서리꽃은 피었다마는,
내몸은 시방 시리고 춥다 겁나게 춥다 내 생에 봄날은 다 갔니라 *
* 그래서 당신
잎이 필 때 사랑했네//
바람 불 때 사랑했네//
물들 때 사랑했네//
빈 가지, 언 손으로//
사랑을 찾아//
추운 허공을 헤맸네//
내가 죽을 때까지//
강가에 나무, 그래서 당신 *
* 매화
매화꽃이 피면//
그대 오신다고 하기에//
매화더러 피지 마라고 했어요//
그냥, 지금처럼//
피우려고만 하라구요 *
* 화무십일홍
앞산
산벚꽃
다 졌네
화무십일홍, 우리네 삶 또한 저러하지요
저런 줄 알면서도 우리들은 이럽니다
다 사람 일이지요
때로는 오래된 산길을 홀로 가는 것 같은 날이 있답니다
보고 잡네요
문득
고개 들어
꽃,
다 졌네 *
* 적막
꽃 폈다
능소화 진다
한낮 불볕 속
깊이 살을 파는
생살의 뜨거움
피가 따라 흐른다
우지 마라
말을 죽이고
나를 죽이고
도도해져서
산처럼 서다 *
* 달
그래, 알았어
그래, 그럴게
나도.....응
그래 *
* 남쪽
외로움이 쇠어//
지붕에 흰 서리 내리고//
매화는 피데//
봉창 달빛에//
모로 눕는 된소리 들린다//
방바닥에 떨어진 흰 머리칼처럼//
강물이 팽팽하게 휘어지는구나//
끝까지 간 놈이//
일찍 꽃이 되어 돌아온다 *
* 만화방창
내 안//
어느 곳에//
그토록 뜨겁고 찬란한 불덩이가 숨어 있었던가요//
한 생을 피우지 못하고 캄캄하던 내 꽃봉오리.//
꽃잎 한 장까지 화알짝 다 피워졌답니다//
그
밤//
그
곳//
그대
앞에서 *
* 방창(方暢)
산벚꽃 흐드러진//
저 산에 들어가 꼭꼭 숨어//
한 살림 차려 미치게 살다가//
푸르름 다 가고 빈 삭정이 되면//
하얀 눈 되어//
그 산 위에 흩날리고 싶었네 *
* 그래요
꽃이 피면 뭐 헌답뎌
꽃이 지면 또 어쩐답뎌
꽃이 지 혼자 폈다가
진 사이
나는 그 사이를 오가며 살았다오
꽃 피고 지는 일 다 다지금 일이지요
겁나게 질고 진
봄날이었구만요
산이 무너지고
디딘 땅이 캄캄하게 푹 꺼지는 줄만 알았지요
그래요
봄에만, 죄가 꽃이 되지요
누구든 다 그렇게
버릴 수 없는
빈 꽃가지 하나씩
마음에 꽂아두고
그래도 이렇게 또 오는 봄
가는 봄을 살지요 *
* 생생(生生)
흰 꽃 곁을 그냥 지나쳤네
한참을 가다 생각하니
매화였다네
돌아가서 볼까 하다
그냥 가네
너는
지금도 거기
생생하게 피어 있을지니
내 생의 한때
환한 흔적이로다 *
* 강
폭설 내린 아침, 밤새워 갈아둔 먹 묻은 붓을 들고
누가 저 골짜기를 단숨에 휘돌아갔느냐 강에서 김이 다 나는구나 *
* 무심헌 세월
세월이 참 징해야
은제 여름이 간지 가을이 온지 모르게 가고 와불제잉
금세 또 손발 땡땡 얼어불 시한이 와불것제
아이고 날이 가는 것이 무섭다 무서워
어머니가 단풍 든 고운 앞산 보고 허신 말씀이다 *
* 환장
그대랑 나랑 단풍 물든 고운 단풍나무 아래 앉아 놀다가
한줄기 바람에 날려 흐르는 물에 떨어져 멀리멀리 흘러가버리든가
그대랑 나랑 단풍 물든 고운 단풍나무 아래 오래오래 앉아 놀다가
산에 잎 다 지고 나면 늦가을 햇살 받아 바삭바삭 바스라지든가
그도 저도 아니면
우리 둘이 똑같이 물들어
이 세상 어딘가에 숨어버리든가 *
* 봄비
비가 오네요//
봄비지요//
땅이 젖고//
산이 젖고//
나무들이 젖고//
나는 그대에게 젖습니다//
앞강에 물고기들 오르는 소리에//
문득 새벽잠이 깨었습니다 *
* 비가 내리네
비를 오래 바라보고 서 있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푸른 비였습니다
산을 오래 바라보고 서 있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푸른 산이었습니다
나무를 오래 바라보고 서 있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푸른나무였습니다
흐르는 물을 오래오래 보고 있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푸른 강이었습니다
달빛 아래 오래 서 있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푸른 달빛이었습니다
나는 그 여인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 마음에서 새잎이 돋아났습니다
사랑의 푸른 새잎이었습니다 *
* 그리움
바람이 불면
내 가슴속에서는 풀피리 소리가 납니다 *
* 사랑
밤길을 달리는데
자동차 불빛 속으로 벌레들이 날아와 유리창에 부딪쳐 죽는다
필사적이다 *
* 마른 장작
비 올랑가
비오고 나먼 단풍은 더 고울 턴디
산은 내맘같이 바작바작 달아오를 턴디
큰일났네
내 맘 같아서는 시방 차라리 얼릉 잎 다 져부렀으먼 꼭 좋것는디
그래야 네 맘도 내 맘도 진정될 턴디
시방 저 단풍 보고는
가만히는 못 있것는디
아. 이 맘이 시방 내 맘이 아니여!
시방 이 맘이 내 맘이 아니랑께!
거시기 뭐시냐
저 단풍나무 아래
나도 오만 가지 색으로 물들어갖고는
그리갖고는 그냥 뭐시냐 거시기 그리갖고는 그냥
확 타불고 싶당게
너를 생각하는 내 맘은 시방 짧은 가을빛에 바짝 마른 장작개비 같당게
나는 시방 바짝 마른 장작이여! 장작 *
* 삶
내가 가는 길에
눈길 가 닿을 티끌 하나
겁먹은 삭정이 하나
두지 마라 *
* 선암사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변할까봐 내 마음 선암사에 두고 왔지요//
오래된 돌담에 기대선 매화나무 매화꽃이 피면 보라고//
그게 내 마음이라고//
붉은 그 꽃 그림자가//
죄도 많은 내 마음이라고//
두고만 보라고//
두고만 보라고 *
* 김용택시집[그래서 당신]-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