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배롱나무 시 모음

효림♡ 2009. 8. 26. 09:36

                  

 

*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 배롱나무 - 홍성운

길을 가다 시선이 멎네

길 모퉁이 목백일홍

품위도 품위지만 흔치 않은 미인이다. 조금은 엉큼하게 밑동 살살 긁어주면
까르륵 까르르륵 까무러칠 듯 몸을 떤다. 필시 바람 때문은 아닐 거다
뽀얀 피부며 간드러진 저 웃음, 적어도 몇 번은 간지럼타다 숨이 멎은 듯

그 절정 어쩌지 못해
한 백여 일 홍조를 띈다

 

* 배롱나무 부처 - 허형만
송광사 대웅전 앞에
배롱나무 한 그루
너른하게 꽃피우고 있었다

다붓한 절간
눈맛나는 붉은 꽃숭어리마다
술렁이는 꽃빛발에
대웅전 부처님은 낯꽃 피고
나는 꽃멀미로 어지러웠다

밤그늘이 조계산 기슭을
바름바름 기어내려올 때쯤이야
이곳에서는 배롱나무가 부처였음을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나의 연못, 나의 요양원 - 황지우
목욕탕에서 옷 벗을 때
더 벗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다
나는 나에게서 느낀다
이것 아닌 다른 생으로 몸 바꾸는
환생을 꿈꾸는 오래된 배롱나무

탕으로 들어가는 굽은 몸들처럼
연못 둘레에
樹齡 三百年 百日紅 나무들
구부정하게 서 있다

만개한 8월 紫薇꽃
부채 바람 받는 쪽의 숯불처럼
나를 향해 점점 밝아지는데
저 화엄탕에 발가벗고 들어가
생을 바꿔가지고 나오고 싶다
불티 같은 꽃잎들 머리에 흠뻑 쓰고

나는 웃으리라, 서울서 벗들 오면
상처받은 사람이 세상을 단장한다
말하고, 그들이 돌아갈 땐
한번 더 뒤돌아보게 하여
저 바짝 藥오른 꽃들
눈에 넣어주리라 

 

* 배롱나무 아래서 - 임영조
어제 피운 바람꽃 진다 / 팔월염천 사르는 농염한 꽃불
밤 사이 시들시들 검붉게 져도 / 또다른 망울에 불을 지핀다
언제쯤 철이 들까? 내내 / 자잘한 웃음소리 간드러지는
늙은 배롱나무의 선홍빛 음순 / 날아든 꿀벌을 깊이 품고 뜨겁다
조금 사리 지나고 막달이 차도 / 좀처럼 下血이 멎지 않는 꽃이다
호시절을 배롱배롱 보낸 멀미로 / 팔다리 휘도록 늦바람난 꽃이여
매미도 목이 쉬어 타는 말복에 / 생피같이 더운 네 웃음 보시한들
보릿고개 맨발로 넘다가 지친 / 내 몸이 받는 한끼 이밥만 하랴
해도, 오랜 기갈을 견뎌온 나는 / 석달 열흘 피고 지는 현란한 修辭
네 새빨간 거짓말도 다 믿고 싶다 / 그 쓰린 기억 뒤로 가을이 오고
퍼렇게 침묵하던 벼이삭은 패리라 / 처서 지나 한로쯤 찬이슬 맞고
햇곡도 다 익어 제 무게로 숙일 때 / 나는 또 한 소식을 기다려보리라
보름 넘어 굶다가 밥상을 받듯 / 받기 전에 배부른 배롱나무 아래서 

 

* 배롱나무꽃 - 정성수  

오백 살 배롱나무가 선국사 앞마당에
가부좌를 틀고 있다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고서
여름밤 폭죽처럼 피워 낸
저 붉은 꽃들
깡마른 탁발승이 설법을 뿜어내는지
인연의 끈을 놓는 아픔이었는지
이승에서 속절없이 사리(舍利)들을 토해내고 있다
배롱나무꽃
붉은 배롱꽃은 열꽃이다
온 몸으로 뜨겁게 펄펄 끓다가 떨어진 꽃잎 자국은
헛발자국이다
피기는 어려워도 지는 것은 금방인 꽃들은
저마다 열병을 앓다가 진다
저물어가는 여름 끝자락에
신열을 앓다가 가는 사람이 있다
배롱꽃처럼 황홀하게
무욕의 알몸으로 저 화엄 세상을 향해서
쉬엄쉬엄 
* 선국사 - 전북 남원시 교룡 산성 내에 있는 사찰

 

배롱나무 꽃 그늘 - 윤은경  

불현듯 열릴 것이네

석 달 열흘 기다려 아주 잠깐 열렸던, 다시는 열고 들어갈 길 없는 문, 그늘은 아무런 말이 없지만, 어쩌나 염천의 푸른 하늘 열꽃 툭툭 터지듯 내 피돌기는 더욱 빨라지는데, 여기 섰던 당신, 이글이글 타오르는 물길, 불길 지나쳐버렸네

이 나무 아래서 오래 벌서듯 다시 수 없는 석 달 열흘을 기다린다면 수 없는 허공이 생겨나고, 수없는 문들이 피어나고, 거기 눈 맞춘 내 어느 하루, 선연히 꽃빛 물든 당신, 붉디붉은 향기의 오라에 묶인다면  새끼손톱만한, 내 일생일대의 두근거림은, 다시

 

* 동학사 배롱나무 - 강가람

눈오는 날, 동학사 계곡에서 배롱나무의 껍질을 보았다

발치에 수북이 벗어놓은, 아이의 살 냄새가 배인

이 세상에서 가장 순한 껍질을 보았다

연하디 연한 신생아의 살 냄새가 배인 배냇저고리 같았다


눈 속의 껍질 하나를 주어 손바닥에 올려놓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양수가 아직 채 마르지도 않아

촉촉한 무늬결 따라 힘줄을 감싸고 있던

붉은 실금들이 선명하다


눈을 맞아 반짝이는 내 손바닥의 손금들처럼

저들의 생애도 저 실금 속에 다 들어 있을까

배롱나무에 등을 기댄 채

웅크린 가슴팍을 포개어 눈발을 맞고 있는

껍질들을 내려다보았다

눈송이가 등에 닿을 때마다 껍질 사이로 무언가 반짝이고 있었다

가슴팍에 가득 품은 좁쌀 같은 것들이

수정알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상처의 껍질도 벗어버리면

아이처럼 순한 눈빛의 사리가 된다는 것을

그날, 나는 동학사 배롱나무에게서 처음으로 배웠다

  

나무 백일홍 - 용혜원
밀려오는 그리움을 터뜨려
하루하루 백일을
황홀한 사랑의 고백을 꿈꾸며
꽃 피어내며 기다리지만
그대는 오지 않았다
 
행복한 날들을 바라며
님의 품이 어찌 따뜻한지
한 해 한 해마다 백일을
꽃 피우며 기다렸지만
그대는 오지 않았다
 
다시 올 날을 기다리며
삶의 모든 해 동안
백일 또 백일을
꽃 피우고 꽃 피우다 보니
그날 동안의 행복에 다시 꽃 피운다
기다림이 있기에
백일홍이 더 아름답다

 

* 목백일홍 - 도종환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 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석달 열흘을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는 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돌아서며 다시 그리워지는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올려
목백일홍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없이 꽃잎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이다

 

* 木百日紅 -千房山을 오르다가·20 - 구재기
하늘이 나에게 땅 한 뼘 주셨으니
지나는 바람이 좀 수상할 양이면
좁다 않고 여기 와서 반듯이 누워
떨어지는 木百日紅 꽃잎이나 바라보리라

木百日紅 꽃잎에
조금조금 밀려오는 설움을 기분 좋게 감춰두고
벌거벗은 억새풀 사이사이로
용하게 비껴 살아왔음을 노래하며
노리끼한 얼굴이나 찬찬히 보듬어 볼까

그러나 어찌

저승에서 태어나 이승으로 자라난 목숨으로
한 세상 마음 편하게 살아가기만 바랄 것인가
늦여름 쓰름매미의 작은 울음이 되어
이슬이나 받아마시며 빈 배를 채우리라
 

 

* 배롱꽃 - 오세영  

아름다움이 애인의 것이라면 안식은

아내의 것,

무더운 여름날

아내의 무릎에 누워

그녀의 시원한 부채질 바람으로 낮잠을

자 본 자는 알리라.

여자는 향그러운 꽃그늘이라는 것을,

꽃의 아름다움보다는

그늘의 안식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형체가 흐려

꽃보다 그늘이 더 넉넉한 꽃,

신(神)은

이 지상의 간난(艱難)을 위해서 누구에게나

한 여자를 예비해 두셨다. * 

 

* 목백일홍 - 김종길

나무로 치면 고목이 되어버린 나도

이 8월의 폭염 아래 그처럼

열렬히 꽃을 피우고 불붙을 수는 없을까

 

* 20세기가 간다 - 안도현

자기 살을 자기 손으로 떼어내며

백일홍이 지고 있다//

백일홍은 왜

자기 연민도 자기에 대한 증오도 없이

자신한테 버럭 소리 한번 지르지도 않고

뚝뚝, 지고 마는가//

여름 한낮, 몸속에 흐르던 강물을

울컥울컥 토해내면서

한 마리 혼절한 짐승같이 웅크리고 있는 나무여//

나 아직도 너에게 기대어

내 몸을 마구 비벼보고 싶은데

혼자서 피가 뜨거워지는 일은

얼마나 두렵고 쓸쓸한 일이냐//

女中生들이 몰래 칠한 립스틱처럼

꽃잎을 받아먹은

지구의 입술이 붉다//

그 어떤 고백도 맹세도 없이

또 한 여자를 사랑해야 하는 날이 오느냐 *

 

* 목백일홍 피는 자리 - 박라연 

명옥헌, 배롱나무 군락지에는 / 그의 속내를 환하게 비춰내 생(生)의 악취를

경계하게 해주는 / 타인을 품을수록 꽉 찬 육체가 되는 / 이슬호수가 있어

장수할수록 서로 눈부실까 / 몇 섬의 이슬이 고이면 나무들은 꽃이 필까

이슬의 집을 꿈꾸다 고개를 들었을 때 / 두 개 이상의 쇠기둥을 의족 삼은 오장육부의 반 이상이 시멘트로 봉합된

배롱나무 오누이들 / 십자가에 못 박힌 형상인데도 / 호수 가득 제 심장을 / 분홍으로 펄떡이게 하고 있다

 

저렇게 아픈 자리가 피워낸 호수였구나!

성자가 아니면서 / 성자처럼 아프면서 꽃 피워내는 자리 / 그 자리에만 새겨야 할 밀서가 있다는 듯

한없이 부리를 찧고 있는 / 호반 새 한 마리  

* 박라연 시집[우주 돌아가셨다]-랜덤하우스중앙

 

* 뜰 앞의 배롱나무 - 법인

비 내린 산사의 아침 /안개숲이 정적에 젖어 있고
뜰 앞의 배롱나무 한 그루 꽃피어 / 이리도 환하다
새들은 제 몸에서 나오는 소리로 / 무심히 꽃가지를 흔든다
다만 소리없이 머무는 것들 / 흘러가는 것들
그 내밀하게 몸짓하는 것들과 더불어 / 나도 그저 그렇게 머물고 흘러가고 / 흔들릴 뿐이다.
그리고서 오랜 세월 비바람 내리고 / 내 눈가의 잔주름 은밀한 웃음의 비밀이 되거든
누이야 / 모란은 천지간에 눈부시게 터지고 / 물소리는 끝도 없이 환하리라

 

* 백일홍(百日紅- 成三問 
  
昨夕一花衰 ㅡ 작석일화쇠
  今朝一花開 ㅡ 금조일화개
  相看一百日 ㅡ 상간일백일
  對爾好銜杯 ㅡ 대이호함배

 

* 어제 저녁 꽃 한 송이 지고
  오늘 아침 꽃 한 송이 피어
  서로 일 백일을 바라보니
  내 너를 대하며 한 잔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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