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오세영 시 모음

효림♡ 2009. 8. 27. 08:18

* 봄은 전쟁처럼 - 오세영  

산천(山川)은 지뢰밭인가

봄이 밟고 간 땅마다 온통

지뢰의 폭발로 수라장이다.  
대지를 뚫고 솟아오른, 푸르고 붉은

꽃과 풀과 나무의 어린 새싹들,  
전선엔 하얀 연기 피어오르고

아지랑이 손짓을 신호로

은폐중인 다람쥐, 너구리, 고슴도치, 꽃뱀...

일제히 참호를 뛰쳐나온다.

한 치의 땅, 한 뼘의 하늘을 점령하기 위한

격돌,  
그 무참한 생존을 위하여 

봄은 잠깐의 휴전을 파기하고 다시

전쟁의 포문을 연다. *

* 오세영시집[봄은 전쟁처럼]-세계사

 

* 봄은 전쟁처럼

늦바람 무섭다더니. 겨우내 적멸로 돌아가리라. 일제히 한 잎마저 벗고 동안거에 들었던 나뭇가지들 입춘 지나, 우수 지나

웅성 꿈틀거린다. 저, 저, 어느새 툭 불거진 눈방울 두릿두릿한 산수유 좀 보게. 살 오른 목련 봉오리 봉긋한 털가리개 좀 보게.

진달래 영산홍 아뜩한 입술부터 샐쭉. 적멸보궁이 눈앞이라도 못 참겠네 못 참아. 여든 살 삭정이도 무릎을 일으켜 세우다

우지끈! 큰일났네. 산 너머 전쟁이 온다네. 울긋불긋 아롱다롱 아무도 안 죽고 무덤마저 살아나는 전쟁이 온다네 

 

* 나무처럼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
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크듯
우리도 그렇게
클 일이다.
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
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그 스스로 물러설 때를 알 듯 * 

 

* 산수유  

나무의 혈관에 도는 피가

노오랗다는 것은

이른 봄 피어나는 산수유꽃을 보면 안다

아직 늦추위로

온 숲에 기승을 부리는 독감

밤새 열에 시달린 나무는 이 아침

기침을 한다

콜록 콜록

마른 가지에 번지는 노오란

열꽃

나무는 생명을 먹지 않는 까닭에 결코

그 피가 붉을 수 없다

 

* 배롱꽃

아름다움이 애인의 것이라면 안식은
아내의 것
무더운 여름날
아내의 무릎에 누워
그녀의 시원한 부채질 바람으로 낮잠을
자 본 자는 알리라
여자는 향그러운 꽃그늘이라는 것을
꽃의 아름다움 보다는
그늘의 안식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형체가 흐려
꽃보다 그늘이 더 넉넉한 꽃
신(神)은
이 지상의 간난(艱難)을 위해서 누구에게나
한 여자를 예비해 두셨다

 

후회(後悔)  
능금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가을은 황홀하다
매달리지 않고
왜 미련 없이 떠나가는가
태양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황혼은 아름답다
식지 않고
왜 바다 속으로 잠기는가
지상에 떨어져
꺼지지 않고 잠드는
불꽃이여
우리도 능금처럼 태양처럼
스스로 떠날 수는 없는 것인가
가장 찬란하게 잠드는 별빛처럼
잊을 수는 없는 것인가
버릴 수는 없는 것인가

 

* 강물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 첫사랑  

여름 한낮

무더위로 하얗게 굳어가는 햇빛 속을

정적에 짓눌린 개구리 하나

첨벙

연못으로 뛰어드는 물소리

  

화들짝

나른한 오수(午睡)에서 깨어나 살포시

눈꺼풀을 치켜뜨고

먼 하늘 바라보는 수련(睡蓮)의 파란

눈빛이여

 

* 사랑  

잠들지 못하는 건
파도다. 부서지며 한가지로
키워내는 외로움
잠들지 못하는 건
바람이다. 꺼지면서 한가지로
타오르는 빛
잠들지 못하는 건
별이다. 빛나면서 한가지로
지켜내는 어두움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끝끝내 목숨을
거부하는 칼

 

* 바닷가에서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

 

폭포 
흐르는 물도 때로는
스스로 깨지기를 바란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끝에서
처연하게
자신을 던지는 그 절망
사람들은 거기서 무지개를 보지만
내가 만드는 것은 정작
바닥 모를 수심(水深)이다
굽이치는 소(沼)처럼
깨지지 않고서는
마음 또한 깊어질 수 없다
봄날
진달래, 산벚꽃의 소매를 뿌리치고
끝 모를 나락으로
의연하게 뛰어내리는 저
폭포의 투신 *

 

* 음악  

잎이 지면
겨울 나무들은 이내
악기가 된다
하늘에 걸린 음표에 맞춰
바람의 손끝에서 우는
악기

나무만은 아니다
계곡의 물 소리를 들어 보아라
얼음장 밑으로 공명하면서
바위에 부딪혀 흐르는 물도
음악이다

윗가지에서는 고음이
아랫가지에서는 저음이 울리는 나무는
현악기
큰 바위에서는 강음이
작은 바위에서는 약음이 울리는 계곡은
관악기

오늘처럼
천지에 흰 눈이 하얗게 내려
그리운 이의 모습이 지워진 날은
창가에 기대어 음악을
듣자

감동은 눈으로 오기보다
귀로 오는 것
겨울은 청각으로 떠오르는 무지개다

 

* 이별의 말
설령 그것이
마지막의 말이 된다 하더라도
기다려달라는 말은 헤어지자는 말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별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하는 것이다
'안녕'
손을 내미는 그의 눈에
어리는 꽃잎
한때 격정으로 휘몰아치던 나의 사랑은
이제 꽃잎으로 지고있다
이별은 봄에도 오는 것,
우리의 슬픈 가을은 아직도 멀다
기다려 달라고 말해다오
설령 그것이

마지막 말이 된다 하더라도. *


* 봄날에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것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봄이 오면
잎새 피어난다는 것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잎새 피면
그늘을 드리운다는 것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나, 너를 만남으로써
슬픔을 알았노라
전신에 번지는 이 초록의 그리움을
눈이 부시게 푸르른 봄날의 그
꽃 그늘을

* 그릇 1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

 

* 살아 있는 흙 -그릇 14  
차라리 깨진다
바닥으로 밀려난 그릇
자리를 찾지 못한
인생은 서성이는데
손님은 아직도
밀려드는데
잔칫상 모퉁이에서
바싹
깨지는 그릇
자리에서 밀린 그릇은
차라리 깨진다
깨짐으로써 본분을 지키는
살아 있는 흙
살아 있다는 것은
스스로 깨진다는 것이다
제 몫의 빵을 얻지 못해
자리를 다투는 인간이여
언제인가 썩을
한 개의 빵을 먹기 위해
너는 그릇을 움켜쥐지만
영원히 주어진 자리란 없다
잔칫상의 타오르는 불꽃 아래서
스스로 깨지는 그릇 하나
사기 그릇 하나


* 겨울 들녘에 서서
사랑으로 괴로운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빈 공간의 충만
아낌 없이 주는 자의 기쁨이 거기 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
떨어진 낱말 몇개

이별을 슬퍼하는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지상의 만남은
하늘에서 영원케 하는 자의 안식이
거기 있다
먼 별을 우러르는
둠벙의 눈빛

그리움으로 아픈 사람은
한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너를 지킨다는 것은 곧 나를 지킨다는 것
홀로 있음으로 오히려 더불어 있게된 자의 성찰이

거기 있다

빈들을 쓸쓸히 지키는 논둑의 저

허수아비 

 

* 겨울노래 -구룡사시편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 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간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온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暴雪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종일 난을 치고
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 원시(遠視)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다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비채


* 당신의 말씀
장미가 그의 색깔이 감옥이듯
백합이 그의 향기가 감옥이듯
말은 나의 감옥입니다
소리로 쌓아올린 벽
그 분절된 의미의 방 안에서
내다보는 창

세상은 하나의 큰 감옥일지
모릅니다
돌은 침묵 속에 갇히고
새는 노래 속에 갇히고
......

아, 그러나 나는
보았습니다. 어느 여름날
이 세상 감옥을 부수는 천둥벼락을
장마 끝 먹구름 환히 걷힌
푸른 하늘을

 

님이여
당신의 음성은 우뢰인가요
그렇다면 나의 감옥을 허물어 주세요
내 말의 문법을 풀어주세요
나의 감옥은 말이랍니다


* 노인헌화가   

그것이 필시 꽃이었던가
절벽에 핀 한 송이
철쭉꽃
그것이 필시 나비였던가
그 꽃에 사뿐히 접은 나래
길 끝나 절벽 있고
절벽 끝에 하늘 있느니
하늘 바라 면벽 천년 염화시중은
아직 눈빛이 찬데
그 미소 허공에 향기롭구나
산이 산이 아니고 절이 절이 아니고
산 밖에 산이 있고 절 밖에 절 있느니
절벽에 올라
꽃 꺾어 오라시던 당신의 말씀
그것이 정녕 꽃이었던가
기르던 소의 고삐를 놓아야만
새처럼 날 수 있는 그 길
그것이 필시 벽이었던가

 

* 열매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 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런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그대는 아는가

모든 생성하는 존재는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먹힐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 보석

化石 속엔 한 마리
새가 난다
결코 地上으로 내려오지 않는 새

내가 흘린 눈물도
쥬라기 地層 어느 하늘 아래
하나의 寶石으로 반짝거릴까
가령 죽음이라든가
죽음 앞에서 초롱초롱 빛나던 눈

스스로 불에 타서 消滅을 선택하는
지상의 별들이여
묻혀라 化石에
영원히 죽는 것은 이미
죽음이 아니다

 

* 보석

그것을 불러 보석이라 이름한다
햇빛에
눈부신 그 반짝거림
강변 모래 언덕에
사금파리 하나 반쯤 묻혀 있다
보석이란 가장 소중한 마음을 이르는 것이려니 
우리 어린 날
네게 바친 이 순수한 영혼의 징표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 이 세상 또
어디에 있으랴
깨진 것은 모두 보석이 된다
한 때 값진 도자기였을지라도
한 때 투박한 사발이었을지라도
그것은 한낱
장에 갇힌 그릇일 뿐
깨지는 것은
완전한 자유에 이른 까닭에

보석이 된다
그 봄날의 풀꽃 반지도
그 강변의 모래성도
지금은 모두 강물에 씻겨갔지만
우리들이 강 언덕엔
눈 부신 보석 하나
푸른 하늘을 지키고 있다
영원처럼....

 

* 적막(寂寞)   

'아'하고 외치면 '아'하고 돌아온다

'아'다르고 '어' 다른데

'아'와 '어' 틀림없이 다르게 돌아오는 그 산울림

누가 불렀을까

산벚나무엔 다시 산벚꽃 피고

산딸나무엔 다시 산딸꽃 핀다

미움과 사랑도 이와 같아라

눈물 부르면 눈물이

웃음 부르면 웃음이 오느니

저무는 봄 강가에 홀로 서서

어제는 너를 실려 보내고 오늘은 또

나를 실려 보낸다

흐르는 물에

텅 빈 얼굴에 들여다보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봄날 오후의 그

적막

 

* 초록별

해오라기, 뜸부기, 물떼새 모두 떠나고
강물조차 얼어붙은 겨울 어스름
빈들엔
갈대 홀로 어두운 하늘을 향해
낡은 하모니카를 분다
허수아비, 허수아비
마른 어깨너머 하나, 둘 돋아나는
초록별

 

은산철벽(銀山鐵壁)  

까치 한 마리

미루나무 높은 가지 끝에 앉아

새파랗게 얼어붙은 겨울 하늘을

엿보고 있다

은산철벽

어떻게 깨트리고 오를 것인가

문 열어라, 하늘아

바위도 벼락 맞아 깨진 틈새에서만

난초 꽃 대궁을 밀어올린다

문 열어라, 하늘아

 

* 오세영(吳世榮)시인

-1942년 전남 영광 출생

-1968년 현대문학에[잠 깨는 추상]등단,1986년소월시문학상,1992년정지용문학상,1999년공초문학상, 2000년만해문학상 수상

-시집 [잠깨는 추상][그릇][임을 부르는 물소리 그 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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