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김혜순 시 모음

효림♡ 2009. 9. 2. 08:34

* 환한 걸레 - 김혜순        
물동이 인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저 아래 우물에서 동이 가득 물을 이고
언덕을 오르는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땅속에서 싱싱한 영양을 퍼 올려
굵은 가지들 작은 줄기들 속으로 젖물을 퍼붓는
여자들 가득 품고 서 있는 저 나무
아래 누워 그 여자들 가랑이 만지고 싶다
짓이겨진 초록 비린내 후욱 풍긴다

가파른 계단을 다 올라
더이상 올라갈 곳 없는
물동이들이 줄기 끝
위태로운 가지에 쏟아 부어진다
허공중에 분홍색 꽃이 한꺼번에 핀다

분홍색 꽃나무 한그루 허공을 닦는다
겨우내 텅 비었던 그곳이 몇 나절 찬찬히 닦인다
물동이 인 여자들이 치켜든
분홍색 대걸레가 환하다
 *  

 

* 잘 익은 사과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 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 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 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민음사  

 

*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직육면체 물, 동그란 물, 길고 긴 물, 구불구불한 물, 봄날 아침 목련꽃 한 송이로 솟아오르는 물, 내 몸뚱이 모습 그대로 걸어가는 물, 저 직립하고 걸어다니는 물, 물, 물……내 아기, 아장거리며 걸어오던 물, 이 지상 살다갔던 800억 사람 몸속을 모두 기억하는, 오래고 오랜 물, 빗물, 지구 한 방울.

 

오늘 아침 내 눈썹 위에 똑, 떨어지네. 자꾸만 이곳에 있으면서 저곳으로 가고 싶은 그런 운명을 타고난 저 물이 초침 같은 한 방울 물이 내 뺨을 타고 어딘가로 또 흘러가네. 

 

* 백마 
갑자기 내 방안에 희디흰 말 한마리 들어오면 어쩌나 말이 방안을 꽉 채워 들어앉으면 어쩌나

말이 그 큰 눈동자 안에 나를 집어넣고 꺼내놓지 않으면 어쩌나 백마 안으로 환한 기차가 한 대

들어오고 기차에서 어두운 사람들이 내린다 해가 지고 어스름 폐가의 문이 열리면서 찢어진 블라우스를 움켜쥐고 시커먼 그녀가 뛰어나오고 별이 마구 그녀의 발목에 걸린다 잠깐만 기다려 해놓고 빈집에

들어가 농약을 마시고 뛰어나온 그녀는 뛰어가면서 몸 속으로 들어온 백마를 토하려 나무를 붙들지만 한번 들어온 말은 나가지 않는다 말의 갈기가 목울대를 간지르는지 울지도 못하고
딸꾹질만 한다 말이 몸 속에서 나가지 않으면 어쩌나 그 희디흰 말이 몸 속에 새긴 길들을 움켜쥐고

밤새도록 기차 한 대 못 들어오게 하면 어쩌나 농약이 성대를 태워버려 지금껏 말 한마디 못하고 백마 한 마리 품고 견디는 그녀에게 물으러 가야 하나 어쩌나 여기는 내 방인데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게스리 말 한마리 우두커니 서 있으니 어쩌나

 

* 날마다 맑은 유리처럼 떠올라

넌 모를 거야
밤마다 내가
잠든 나를 살그머니 눕혀놓고
네게로 간다는 걸

이건 더욱 모를 거야
밤마다 네가
잠든 너를 벗어나
나를 맞으러 나온다는 걸

 

우리 둘이서 즐거이 손잡고
요단강을 넘나들며
벗은 몸에 수천의 꽃잎을 달고
아름다운 불꽃을
입으로 내뿜으면서
발목에 지구를 매달고 날아다닌다는 걸
정말 모를 거야
 
깊은 밤 우리 둘이서
맑은 유리처럼 떠올라
하늘을 마시고 달을 삼키며
그림자도 없이
사랑하고 포옹한다는 걸
넌 모를 거야

그리고 넌 이것도 모를 거야
밤이 가고 아침이 오면
우리는 헤어져
다시 잠든 몸속으로 들어가
소리도 없이
드러눕는다는 걸
드러누워 불을 끄고
땅속 깊이 우리의 꽃대궁을
묻어둔다는 걸
그리고 잠 속 깊이 우리의 영혼을
감춘다는 걸
넌 더욱 모를 거야 *

 

* 얼음비단, 얼음아씨

아주 아주 더운 여름날
땡볕 속을 걸어가고 있는데
아주 아주 멀고 먼 곳에서 누군가 나를 안았어요.


한 번도 녹아 본 적이 없는 머나먼 눈나라
그 나라의 얼음 아씨들이
눈을 먹고 사는 누에가 짠 빙잠(氷蠶)에서 실을 뽑아선
시리딘시린 얼음 비단 치마저고리 만들어 입고선
내 가슴 속을 환하게 밝히며 들어왔어요.


아주 아주 더운 여름날
땡볕 속에서 가로수들 녹고 있는데
어디선가 불어온 차디찬 바람이 내 손톱들을
저 멀고먼 나라로 몰아가 버렸어요
나는그만 오갈 데 없어진 사막의 물새알처럼
신호등 앞에 둥그런 눈사람으로 서 있었어요.


천사란 가슴 속에, 온몸 속에
핏줄마다 살결마다 스며드는 것
효모처럼 내 몸 속에서 부푸는 눈보라
얼음 아씨들 내 몸 속에서
솜털처럼 휘날렸어요.
그 가볍고도 환한 눈물이 이불처럼
내 속을 그만 안아 버렸어요. *

 

* 납작납작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하나님, 보시니 마땅합니까? *

 

* 하늘강아지
따뜻하고 부드러워.
마시멜로 같아.
맥박은 작고 빠르고.
방심한 눈앞으로 퍼뜩 지나가버리고 말아. 
그 작은 분홍 입속에 손가락을 넣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 세상에서 제일 부드러운. 

너무 부드러워 껴안을 수조차 없는.
늘 아침엔 우유 한 접시를 부엌에 놔둬야 할걸.
저것 좀 봐 잠들면 저렇게
안개 공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잖아.
조심해 입김 한 방에도 사라질지 몰라. 
나 그거 안고 싶어서

해 뜰 때 새털구름 같은 몸살!
물끄러미 바라보면 부엌문 앞에
투명한 작은 공 한 개처럼 맺힌 것.
어쩌면 내 몸에서 나 몰래 나온 것일지도 몰라.
어쩌면 하늘에서 내 부엌까지 내려온 걸까?
나 태어나기 전 너무 가벼워 구천을 날던 그것,
나 데려가려고 다시 온 그것?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하늘강아지.
또 눈앞을 퍼뜩

지나가네.

 

* 별을 굽다  

사당역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려고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올라가서
뒤돌아보다 마주친 저 수많은 얼굴들
모두 붉은 흙 가면 같다
얼마나 많은 불가마들이 저 얼굴들을 구워냈을까

무표정한 저 얼굴 속 어디에
아침마다 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밖에서는 기척도 들리지 않을 이 깊은 땅속을
밀물져 가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하늘 한구석 별자리마다 쪼그리고 앉아
별들을 가마에서 구워 내는 분 계시겠지만
그분이 점지하는 운명의 별빛 지상에 내리겠지만
물이 쏟아진 듯 몰려가는
땅속은 너무나 깊어
그 별빛 여기까지 닿기나 할는지

수많은 저 사람들 몸속마다에는
밖에선 볼 수 없는 뜨거움이 일렁거리나 보다
저마다 진흙으로 돌아가려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불가마 하나씩 깃들어 있나 보다

저렇듯 십 년 이십 년 오십 년 얼굴을 구워 내고 있었으니
모든 얼굴은 뜨거운 심장이 굽는 붉은 흙 가면인가 보다
 

* 김혜순시집[당신의 첫]-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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