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이병기 시조 모음

효림♡ 2009. 9. 3. 09:02

* 대성암(大聖庵) - 이병기    

고개 고개 넘어 호젓은 하다마는
풀섶 바위서리 발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할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 쪽이 발끝에 부딪치고
城을 고인 돌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뫼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깊은 바위굴에 솟아나는 맑은 샘물
위로 뚫린 구멍 내려오던 供養米를
이제도 義相을 더불어 新羅時節 말한다
 
볕이 쨍쨍하고 하늘도 말갛더니
설레는 바람 끝에 구름은 서들대고
거뭇한 먼 산 머리에 비가 몰아 들온다

 

*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암 데나 정들면 못 살리 없으련마는
그래도 나의 고향이 아니 가장 그리운가

방과 곳간들이 모두 잿더미 되고
장독대 마다 질그릇 조각만 남았으나
게다가 움이라도 묻고 다시 살아봅시다

삼베 무명옷 입고 손마다 괭이 잡고
묵은 그 밭을 파고 파고 일구고
그 흙을 새로 걸구어 심고 걷고 합시다 *

 

* 별 1

홀로 밤을 지켜 바라던 꿈도 잊고
그윽한 이 우주를 가만히 엿보고
빛나는 별을 더불어 가슴 속을 밝힌다

 

 

* 별 2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

 

* 박연폭포

이제 산에 드니 산에 정이 드는구나
오르고 내리는 길 괴로움을 다 모르고
저절로 산인(山人)이 되어 비도 맞아 가노라

이 골 저 골 물을 건너고 또 건너니
발 밑에 우는 폭포 백이요 천이러니
박연을 이르고 보니 하나밖에 없어라

봉머리 이는 구름 바람에 다 날리고
바위에 새긴 글발 메이고 이지러지고
다만 그 흐르는 물이 궂지 아니하도다

 

* 매화
외로 더져 두어 미미히 숨을 쉬고
따뜻한 봄날 돌아오기 기다리고
음음한 눈얼음 속에 잠을 자던 그 매화

손에 이아치고 바람으로 시달리다
곧고 급한 성결 그 애를 못 삭이고
맺었던 봉오리 하나 피도 못한 그 매화

다가오는 추위 천지를 다 얼려도
찾아드는 볕은 방으로 하나 차다
어느 뉘(世) 다시 보오리 자취 잃은 그 매화

 

* 매화 2 

더딘 이 가을도 어느덧 다 지나고
울 밑에 시든 국화 캐어 다시 옮겨 두고
호올로 술을 대하다 두루 생각나외다

 

뜨다 지는 달이 숲 속에 어른거리고
가는 별똥이 번개처럼 빗날리고
두어 집 외딴 마을에 밤은 고요하외다

 

자주 된서리 치고 찬바람 닥쳐 오고
여윈 귀뚜리 점점 소리도 얼고
더져 둔 매화 한 등걸 저나 봄을 아외다

 

* 오동꽃

담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
한두 개 소리 없이 나려지는 오동(梧桐)꽃을
가랴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

 

* 蘭草 

1. 한 손에 책(冊)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2. 새로 난 난초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침 볕이 발틈에 비쳐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 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3.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孤寂)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4.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淨)한 모래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
 

 

* 구름

새벽 동쪽 하늘 저녁은 서쪽 하늘
피어나는 구름과 그 빛과 그 모양을
꽃이란 꽃이라 한들 그와 같이 고우리

그 구름 나도 되어 허공에 뜨고 싶다
바람을 타고 동으로 가다 서으로 가다
아무런 자취가 없이 스러져도 좋으리

 

* 냉이꽃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 때 밥은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시도 읊고 싶구나

지난 봄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 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그 얼마나 다를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태양이 그대로라면 지구는 어떨 건가
수소탄 원자탄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

 

* 수선화

풍지(風紙)에 바람 일고 구들은 얼음이다
조그만 책상(冊床) 하나 무릎 앞에 놓아두고
그 뒤엔 한두 숭어리 피어나는 수선화(水仙花)

투술한 전복껍질 바로달아 등에 대고
따뜻한 볕을 지고 누워 있는 해형수선(蟹形水仙)
서리고 잠들던 잎도 굽이굽이 펴이네

등(燈)에 비친 모양 더우기 연연하다
웃으며 수줍은 듯 고개 숙인 숭이숭이
하이얀 장지문 위에 그리나니 수묵화(水墨畵)를

 

* 저무는 가을

들마다 늦은 가을 찬바람이 움직이네
벼이삭 수수이삭 으슬으슬 속살이고
밭머리 해 그림자도 바쁜 듯이 가누나

무 배추 밭머리에 바구니 던져 두고
젖먹는 어린아이 안고 앉은 어미 마음
늦가을 저문 날에도 바쁜 줄을 모르네

 

* 계곡

맑은 시내 따라 그늘 짙은 소나무 숲
높은 가지들은 비껴드는 볕을 받아
가는 잎은 비늘처럼 어지러이 반짝인다

청기와 두어 장을 법당에 이어두고
앞뒤 비인 뜰엔 새도 날아 아니 오고
홈으로 내리는 물이 저나 저를 울린다

헝기고 또 헝기어 알알이 닦인 모래
고운 옥과 같이 갈리고 갈린 바위
그려도 더럽힐까봐 물이 씻어 흐른다

폭포소리 듣다 귀를 막아도 보고
돌을 베개삼아 모래에 누워도 보고
한손에 해를 가리고 푸른 허공 바라본다

바위 바위 위로 바위를 업고 안고
또는 넓다 좁다 이리저리 도는 골을
시름도 피로도 모르고 물을 밟아 오른다

얼마나 엄하다 하리 오르면 오르는 이 길
물소리 끊어지고 흰 구름 일어나고
우러러 보이던 봉우리 밭 아래에 놓인다

 

* 낙엽(落葉)
담어리 굴참나무 그늘도 짙을러니
높은 가지 끝에 한두 잎 달려 있고
소소리 바람이 치는 벌써 가을이구려

지는 잎 너도 어이 갈 바를 모르고서
바람에 흩날리어 이리저리 헤매느냐
그러다 발에 밟히어 흙이 되고 마느냐

날아드는 잎이 뜰앞에 가득하다
바람이 지고 달은 고이 비쳐들고
밤마다 서리는 내려 하얗게도 덮는다

 

* 송별(送別)

재너머 두서너 집 호젓한 마을이다

촛불을 다시 혀고 잔 들고 마주 앉아

이야기 끝이 못 나고 밤은 벌써 깊었다

 

눈이 도로 얼고 산머리 달은 진다

잡아도 뿌리치고 가시는  이 밤의 정이

십리가 못되는 길도 백리도곤 멀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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