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조향미 시 모음

효림♡ 2009. 9. 4. 08:25

* 국화차 - 조향미  

찬 가을 한 자락이

여기 환한 유리잔

뜨거운 물 속에서 몸을 푼다

인적 드문 산길에 짧은 햇살

청아한 풀벌레 소리도 함께 녹아든다

언젠가 어느 별에서 만난

정결하고 선한 영혼이

오랜 세월 제 마음을 여며두었다가

고적한 밤 등불 아래

은은히 내 안으로 스며든다

고마운 일이다 *

 

* 온돌방  

할머니는 겨울이면 무를 썰어 말리셨다

해 좋을땐 마당에 마루에 소쿠리 가득
궂은 날엔 방 안 가득 무 향내가 났다
우리도 따순 데를 골라 호박씨를 늘어놓았다

실겅엔 주렁주렁 메주 뜨는 냄새 쿰쿰하고

작은방 구석에는 수수대로 엮어놓은 곳에 고구마 가득
윗목에선 콩나물이 쑥쑥 자라고
아랫목 술독엔 향기로운 술이 익어가고 있었다

설을 앞두고 어머니는 조청에 버무린

쌀 콩 깨 강정을 한 방가득 펼쳤다
문풍지엔 바람 쌩쌩 불고 문고리는 쩍쩍 얼고
아궁이엔 지긋한 장작불
등이 뜨거워 자반처럼 이리저리 몸을 뒤집으며
우리는 노릇노릇 토실토실 익어갔다

그런 온돌방에서 여물게 자란 아이들은

어느 먼 날 장마처럼 젖은 생을 만나도
아침 나팔꽃 처럼 금세 활짝 피어나곤 한다
아, 그 온돌방에서
세월을 잊고 익어가던 메주가 되었으면
한 세상 취케 만들 독한 밀주가 되었으면
아니 아니 그보다
품어주고 키워주고 익혀주지 않는 것 없던
향긋하고 달금하고 쿰쿰하고 뜨겁던 온돌방이었으면 *

 

* 못난 사과  
못나고 흠집 난 사과만 두세 광주리 담아 놓고
그 사과만큼이나 못난 아낙네는 난전에 앉아 있다
지나가던 못난 지게꾼은 잠시 머뭇거리다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 짜리 한 장 꺼낸다
파는 장사치도 팔리는 사과도 사는 손님도
모두 똑같이 못나서 실은 아무도 못나지 않았다 *  

 

* 문

밤 깊어
길은 벌써 끊어졌는데
차마 닫아 걸지 못하고
그대에게 열어 둔
외진 마음의 문 한 쪽
  
헛된 기약 하나
까마득한 별빛처럼 걸어둔 채
삼경 지나도록
등불 끄지 못하고
  
홀로 바람에 덜컹대고 있는
저 스산한 마음의 문 한 쪽 *

 

* 들꽃 같은 시 
그런 꽃도 있었나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이 더 많지만
혹 고요한 눈길 가진 사람은
야트막한 뒷산 양지 바른 풀밭을 천천히 걷다가
가만히 흔들리는 작은 꽃들을 만나게 되지
비바람 땡볕 속에서도 오히려 산들산들
무심한 발길에 밟히고 쓰러져도
훌훌 날아가는 씨앗을 품고
어디서고 피어 나는 노란 민들레
저 풀밭의 초롱한 눈으로 빛나는 하얀 별꽃
허리 굽혀 바라보면 눈물겨운 작은 세계

참, 그런 눈길 고요한 사람의 마을에는
들꽃처럼 숨결 낮은 시들도
철마다 알게 모르게 지고 핀다네 *

 

* 양지밭

햇볕이 넘실넘실

사방 팔방 날아온

오만 가지 풀씨

멋대로 자란 풀밭

아무도 돌보지 않은 공터

큰 나무 한 그루 없어

오히려 싱그런 풀꽃들이

자유로이 풍요로이

열린 하늘 아래 넘실넘실 *

 

* 꽃 핀 오동나무 아래  

꽃 핀 오동나무를 바라보면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하다
하늘 가득 솟아 있는 연보라빛 작은 종들이 내는
그 소릴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오동 꽃들이 내는 소리에 닿을 때마다
몸이 먼저 알고 저려온다
무슨 일이 있었나 내 몸이
가얏고로 누운 적이 있었던 걸까
등에 안족을 받치고 열두 줄 현을 홑이불 삼아 덮고
풍류방 어느 선비의 무릎 위에 놓여
자주 진양조로 흐느꼈던 것일까
늦가을 하늘 높은 어디쯤에서 내 상처인 열매를
새들에게 나누어 준 적도 있었나
마당 한켠 오동잎 그늘 아래서
한 세상 외로이 꽃이 지고 피는 걸 바라보며
살다 간 은자(隱者)이기도 했을까
다만 가슴이 뻐개어질 듯
퍼져 나가려는 슬픔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꽃 핀 오동나무 아래 지나간다
무슨 일이 있었나 나와 오동나무 사이에
다만 가슴이 뻐개어질 듯
해마다
대낮에도 환하게 꽃등을 켠
오동나무 아래 지난다 *

 

* 꺾인 나뭇가지 
나는 한때 내 생이 꺾인 나뭇가지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폭풍우가 치고 숲이 휘청거리고 다시 말짱하게 개인 하늘 아래
숲이 몸을 추스리고 정신 차려 보면 그 풍우 속에서도 의연히 버틴 나무들
그러나 가지 몇 개는 부러지고 몇 그루 나무들은 둥치째 넘어져 있기 일쑤다

어찌하랴 우주가 있으므로 풍우가 있고 나무가 있으므로 꺾이는 가지도 있는 것을
저 나무는 튼실한데 왜 나만 꺾였냐고 오래 슬퍼할 일이 아니다
산에는 솟은 봉우리가 있고 가라앉은 골짜기도 있다
오래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있고 먼저 비로 내리는 구름도 있는 것이다
봉우리는 운이 좋고 골짜기는 운이 나쁜 게 아니다
구름은 즐거운 것이고 비는 슬픈 거라고 말해선 안 된다
봉우리는 밝은 햇볕을 쬐고 골짜기는 맑은 물을 품을 것이다
또한 저 구름도 머잖아 비가 되고 이 비도 곧 구름이 될 것이다

꺾인 나뭇가지가 숲에 놀러 온 동네 개구장이의 손에 들려 숲을 떠나면
그 아이가 동무들과 신나게 휘두르는 나무칼이 될 수도
그 어머니 맵차게 후려치는 회초리가 될 수도 있겠지
숲에서 다람쥐와 덩쿨 식물의 즐거운 버팀목이 되었지만
이제 마을에선 한 아이의 삶을 받드는 지렛대가 될지 모른다

설사 아궁이에 던져져 하룻밤 불쏘시개가 되어도
그 더운 연기는 넓디넓은 우주 속에 스며들 것이다
그리고 다시 우주는 한 그루 어린 나무를 키우리라 *

 

* 함양 군내버스

함양 백전 녹색대학 가는 버스는 오십 분 간격이다

버스가 떠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일찍 차에 오르니 할머니만 다섯 먼저 타고 계시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노친네들은 서로 거리낌없다

할매는 올해 나이가 몇이오

나는 아직 얼마 안 돼요 칠십서이

아직 젊구마 한참 농사 짓겄네

그래도 오만 데가 아푸고 쑤시요 할매는 얼마요
나는 칠십아홉 저 할매 하고 동갑이오
칠십셋은 아직 괜찮소 여섯 넘기먼 영 힘에 부치요
손수레와 도리깨를 옆에 둔 할머니가 칠십, 제일 젊다
중년 아낙 둘이 상자 보따리를 들고 새로 탔다
저기 뭣이꼬
삼이까
삼은 아인 거  같은데 더 무거버 비는데
젊은 할머니가 호기심을 참지 못한다
새댁이 그기 뭣이요
친정엄마가 싸주는 거라요
아이고, 추석도 하마 지났는데 친정엄마씨가 꼭꼭 챙기 놨구마
자식들한테 저래 싸주마 맘이 시원하제
하모요, 오목조목 싸주먼 묵을 놈이 묵으니께 주는 마음 좋고
싸갖고 가먼 어매가 주는 거니께 묵으면서 좋고 안 그라요
할매는 콩 도리깨를 샀구마 올해는 콩이 질어서 타작 좀 하겄네
콩이 잘 되야제 팥 없이는 살아도 콩 없이는 못 사니께
할머니는 도리깨로 마당 가득 콩타작 하여
둥글둥글 메주 띄워 간장 된장 청국장 단지 단지 담아
전국 각지 오남매에게 또 오목조목 싸 부칠 것이다
묵을 놈이 묵으니께 주는 마음 시원하제 *

* 조향미시집[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실천문학사


*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녹색평론'을 위하여 

지구 저편 어느 먼 숲에

햇빛과 바람과 빗방울이 어울려

여문 씨앗 하나 우람한 나무로 키웠다

벌목꾼과 선원과 노동자와 상인들을 거쳐

나무는 숲을 떠나 내게로 왔다

매끈매끈한 흰 종이에

나는 습작시 몇 편을 담았다가 미련 없이 던진다

아무렇게나 툭툭 나뭇가지를 분지른다

종이들은 뭉텅뭉텅 휴지통으로 들어간다

자판을 잘못 친 손가락에 쿵쿵 거목들이 쓰러진다

쓰러진 나무 버려진 종이들은 다시 한 번

거무스름한 재생 용지로 살아나기도 했으나

사람들은 그깟 것, 시쁘게 여긴다

숲은 성글어지고 지구는 숨이 가빠왔다

병이 깊었으나 모두들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는 불쑥 새로운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근심스레 깊은 눈빛 몇몇 사람은 견딜 수 없는 통증을 느꼈다

통증은 쓰러진 나무에서부터 왔다

그들은 팽개쳐진 재생 종이에 새 숨을 불어넣었다

뿌리내릴 땅을 잃고 허공을 떠도는 풀씨의 비애

비참히 사육되고 흔적 없이 멸종하는 동물의 절망

오만한 제국의 폭격에 짐승처럼 쓰러져 누운

굶주리고 짓눌린 사람들의 고통과 분노가 깨어났다

또한,

대지에 겸허히 허리 굽혀 일하는 사람들의 행복

끝없는 경주를 거부한 느린 도보의 즐거움

무욕한 가난의 자유로움 공존의 기쁨이

거친 재생 종이와 함께 살아나기 시작했다

땅만큼 낮은 것들이 깨어나자

하늘만큼 높은 것들도 함께 일어났다

 

침통히 무겁고도 화안히 가벼운 한 권의 책이 된

재생 종이는 이제 스스로 싱싱한 영혼이었다

먼 숲의 바람과 새 소리와 빛나는 향기와

우람한 나무로 그는 부활하였다

이전에 무심히 분지르고 쓰러뜨렸던

그 나무가 나에게 푸르른 팔을 벌렸다 *

* 조향미시집[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실천문학사

 

* 오후의 산책

모처럼 해 밝을 때 퇴근한 날

집 뒤의 산길 오르다

살랑대는 나뭇잎 풀잎 사이로

뉘엿뉘엿 햇살 깔리는 오솔길에 들면

느긋한 소 한 마리가 된 듯하다

하루치 빠듯한 노동을 끝내고

잔등에 노오란 볕살을 받고 앉아

시름없이 천천히 되새김질하는 소

아직 햇볕이 남아 있는

등 뒤의 언덕은 푸근하고 든든하다

소에게 등 비빌 언덕이 있는 것처럼

내 뒤로는 듬직한 산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기쁨이냐

소가 여물을 한입에 먹어치우지 않듯이

오후의 산책에선 산 정상을 탐하지 않는다

귀한 책은 하루에 몇 장씩만 되새겨 읽는 것

나머지는 온전히 어느 하루를 위해 남겨둔다

소가 어슬렁어슬렁 느린 걸음을 떼놓을 시간

산은 깊은 묵상으로 들어가고

마을엔 하나 둘 불빛이 내걸린다 

* 조향미시집[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실천문학사

 

* 조향미시인

-1961년 경남 거창 출생

-1984년 무크지[전망]

-시집 [길보다 멀리 기다림은 뻗어 있네][새의 마음][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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