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 - 김용택
어둠이 몰려오는
도시의 작은 골목길 1톤 트럭 잡화장수
챙이 낡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전봇대 밑 맨땅을 발로 툭툭 찬다
돌아갈 집이나 있는지
한시도 사랑을 놓지 말자 *
* 달을 건져가네
달 떴네//
꽃 지는가//
내 얼굴이 흐리네//
물살은 거세고//
달은 떠내려가네//
어느 굽이인가//
메마른 손이//
달을 거져가네 *
* 그리움
오다 말다
창호지 문살에
눈 그림자 스치네
마음은 천리만리 무심인데
귀는 문밖에 서성이며
눈 맞네
* 풍경
추호의 망설임도 없다
무심에 가까운 단호함
극도의 사랑
어머니, 하얀 오리목을
단칼에 내려치다
* 깊은 밤
깊은 밤
강가에 나가
담배를 태우다가 마을을 돌아보면
한두 집은 불빛이
새어나온다
마을은 하루도 깊은 밤이 없는 것이다
* 지리산 호랑이
할머니는 동네에서 나쁜 일을 저지르는 놈들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런 호랭이가 칵 물어갈 놈들! 지리산 호랭이는 저런놈들 안 물어가고 어디서 뭣 허는지 모르겄다."
지리산에 호랑이가 살 때였다
지금은 지리산에 호랑이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리산에 호랑이가 없다고 해서,
저렇게 나쁜 짓들을 뻔뻔하게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수만번 변해도 지리산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꽃
한점 숨김이 없다 망설임도 없다 꽃은
꽃잎 속 제 그늘에도 티 한점 없다
꽃은 호랑이도 살얼음도 무섭지 않다
허튼 짓이 없으니, 섭섭지도 않고
지는 것도 겁 안난다
* 실천
밤새워 생각들을 뒤적이다가
아침에 일어났더니, 창밖 벚꽃들이 자글자글 피어난다
꽃들이 나보다 훨씬 빠르다
* 가뭄
가을볕이 좋다. 한없다. 햇볕 아래 앉아 이렇게 저렇게 손을 말린다. 열 개의 발가락을 벌려 말린다.
아, 입을 벌려 입속을 말린다. 사람의 마음을 뒤집어 보일 수만 있다면 나는..... 메마른 입술 바스라지는 가슴,
풀잎들이 돌아눕는다. 산을 넘어오는 바짝 마른 길이 내 발끝에 와닿는다. 바람에 끌려가는 불쌍한 나의 사랑
그리고 나의 시..... 바람도 없고, 오가는 이 없는 빈 들이 멀리까지 쓸쓸하다.
사랑, 말하지 말라. 어디서 오든, 어디로 가든, 오늘은 마른 가을이다.
* 두메산골
눈 왔다//
일없다//
눈 녹아//
떨어지는//
낙숫물소리//
일없이//
똑 똑 똑//
쪼르르 촘방!//
처마 밑//
땅을 판다//
심심하다//
그만//
밥 먹자고//
부른다 *
* 진달래꽃
진달래꽃은 슬프다. 애잔하고, 애틋하고, 애닯다. 진달래꽃은 서럽다. 허기지고, 배고프다.
진달래꽃은 식민지, 나라, 조국, 독립군, 이별, 초가 아래 가난한 어머니, 유랑, 사랑을 고백 못하고
딴 데로 시집가는 누님의 감춘 눈물, 지게 지고 산 넘어오는 나무꾼이 생각난다.
도망, 억울한 사랑, 머슴과 주인집 딸, 지게, 짚신, 신동엽이 생각난다. 진달래꽃은 아직도 슬프다.
* 오동꽃
다 꽃피면 지겠지요
꽃 다 지면 가겠지요
가면 아니 오겠지요
온다 간다 말 줄였지요
* 앞동산에 참나무야
앞동산의 어떤 나무는 오늘 새롭고
뒷동산 어떤 나무는 지금 낯설다
그런데 또
저 참나무는 어제 그대로구나
* 춘설
청매 홍매//
꽃밭에 눈 날리네//
지상에 헛짓인//
저 지랄 난분분//
미친년 데리고//
산은 도망갔네//
내놓은 살에//
오 소 소//
개방울 돋네 *
* 김용택시집[수양버들]-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