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장석주 시 모음

효림♡ 2009. 9. 7. 08:28

*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 장석주   

땅거미 내릴무렵 광대한 저수지 건너편 외딴

 

함석 지붕 집

굴뚝에서 빠져나온 연기가 

흩어진다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오,  저것이야 !

아직 내가 살아 보지 못한 느낌!

 
*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

 
* 그믐 
흑염소 떼가 풀을 뜯고 있다.
어둑했다.
젊은 이장이 흑염소 떼 끌어가는 걸
깜박했나 보다.


내 몸이 그믐이다.
가득 찬 슬픔으로 캄캄하다.
저기 먼 곳이 있다. 
먼 곳이 있으므로 캄캄한 밤에
혼자 찬밥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

* 장석주시집[몽해항로]-민음사

 

* 빗발, 빗발

빗발, 빗발들이 걸어온다 자욱하게 공중을 점령하고 도무지 부르튼 발이 아픈 줄도 모르고 얼마나

먼 데서 예까지 걸어오는 걸까... 천 길 허공에 제 키를 재어가며 성대제거 수술 받은 개들처럼

일제히 운다... 자폐증 누이의 꿈길을 적시며 비가 걸어온다... 봐라, 발도 없는 게 발뒤꿈치를

들고 벼랑 아래로 뛰어내려 과수원 인부의 남루를 적시고 마당 한 귀퉁이의 모과나무를 적신다...

묵은 김치로 전을 붙이고 있는 물병자리 남자의 응고된 마음마저 무장해제 시키며 마침내는 울리고 간다...

저 공중으로 몰려가는 빗발, 저 쬐끄만 빗발들...

 

* 가을 법어(法語)  

태풍 나비 지나간 뒤 쪽빛 하늘이다

푸새것들 몸에 누른빛이 든다

여문 봉숭아씨방 터져 흩어지듯

뿔뿔이 나는 새떼를

황토 뭉개진 듯 붉은 하늘이 삼킨다 

 

대추열매에 붉은빛 돋고

울안 저녁 푸른빛 속에서

늙은 은행나무는 샛노란 황금비늘을 떨군다

쇠죽가마에 괸 가을비는

푸른빛 머금은 채 찰랑찰랑 투명한데

그 위에 가랑잎들 떠 있다 

 

........몸 뉘일 위도에

완연한 가을이구나!

어두워진 뒤 오래 불 없이 앉아

앞산 쳐다보다가

달의 조도(照度)를 조금 더 올리고

풀벌레의 볼륨은 키운다 

복사뼈 위 살가죽이 자꾸 마른다

가을이

저 몸의 안쪽으로 깊어지나 보다 *

 

* 썰물 

저 물이 왔다가 서둘러 가는 것은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저 너른 뻘밭은
썰물의 아픈 속내다

저 물이 왔다가 서둘러 가는 것은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저 뻘밭에
여름 철새 무리의 무수한 발자국들은
문자를 깨치지 못한
썰물의 편지 같은 것

썰물이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도
저렇게 서둘러 돌아가는 것은

먼 곳에서
누군가 애타게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 명자나무  

불행을 질투할 권리를 네게 준 적 없으니
불행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마라!

불행 앞에서 비굴하지 말 것. 허리를 곧추세울 것. 헤프게 울지 말 것. 울음으로 타인의 동정을 구하지 말 것

꼭 울어야 한다면 흩날리는 진눈깨비 앞에서 울 것. 외양간이나 마른 우물로 휘몰려가는 진눈깨비를 바라보며 울 것

비겁하게 피하지 말 것. 저녁마다 술집들을 순례하지 말 것. 모자를 쓰지 말 것. 콧수염을 기르지 말 것

딱딱한 씨앗이나 마른 과일을 천천히 씹을 것. 다만 쐐기풀을 견디듯 외로움을 혼자 견딜 것

쓸쓸히 걷는 습관을 가진 자들은 안다
불행은 장엄 열반이다
너도 우니? 울어라, 울음이
견딤의 한 형식인 것을
달의 뒤편에서 명자나무가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마라

 

* 서울의 병(病)  

가는 빗발 날리는 종로를 걷다가

느닷없는 서울의 비명을 듣는다

우리 중 아무도 미처 눈치채기 전에 서울의 신음소리는

도처에서 몰려나와 거리에 넘치고

너무 많은 구둣발이 신음소리를 밟고 있구나

오호라 서울 시민들은 귀가 먹었다

밤마다 철근이 박힌 상처를 끌어 안으며

상한 짐승처럼 엎어져 잠들지 못하고 울부짖는

서울의 비명을 못듣는구나

아무나 위독한 서울을 살려다오

서울의 하늘에 신선한 산소를 다오

깨끗한 햇빛을 아니 조용히 놓아만 다오

잠들지 못하는 이유를 알기 위하여

서울 변두리의 몇 포기 풀을 뽑아보라

죽은 풀뿌리가 움켜잡는 죽은 흙덩이

새 잎을 돋게 하던 서울의 뿌리가 썩고 있구나

서울의 혈관을 흐르는

서울의 정신은 함부로 더럽혀졌구나 

 

* 밥  

귀 떨어진 개다리 소반 위에 
밥 한 그릇 받아놓고 생각한다
사람은 왜 밥을 먹는가
살려고 먹는다면 왜 사는가

한 그릇의 더운 밥을 얻기 위하여
나는 몇 번이나 죄를 짓고
몇 번이나 자신을 속였는가

밥 한그릇의 사슬에 매달려 있는 목숨
나는 굽히고 싶지 않은 머리를 조아리고
마음에 없는 말을 지껄이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발을 들여 놓고
잡고 싶지 않은 손을 잡고
정작 해야할 말을 숨겼으며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했으며
잡고 싶은 손을 잡지 못했다

나는 왜 밥을 먹는가, 오늘

다시 생각하며 내가 마땅히

지켰어야 할 약속과 내가 마땅히

했어야 할 양심의 말들을

파기하고 또는 목구멍 속에 가두고

그 대가로 받았던 몇 번의 끼니에 대하여

부끄러워 한다. 밥 한 그릇 앞에 놓고, 아아

나는 가룟 유다가 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한다. 밥 한 그릇에

나를 팔지 않기 위하여 

             

* 미궁  

길 없네
갑자기 길들 사라졌네
얼굴 다친 나
가슴 없는 나
얼어붙은 구두를 신고
미궁에 빠졌네

 

길 없네
갑자기 길들 사라졌네
내 앞에 검은 노트
하얀 나무가 자라는 검은 노트
나는 읽을 수 없네
나는 미궁에 빠졌네 

           

* 절벽  

모란꽃 수명은 짧고

별들은 궁륭에서 벌 떼처럼 붕붕거린다.

방울새는 땅에서 알을 품고

뱀장어 치어들은 봄강을 거슬러 오른다.

늙은 어머니가 새벽에 깨서

빗자루로 마당을 쓰는 동안

밀실에서는 육해공군의 머릿수와

野砲와 장거리미사일을 대폭 늘리려고

머리를 맞댄 채 긴 회의를 한다.

그들은 결심을 하면

서류마다 서명을 한다.

적란운과 별똥별과 오솔길은 모르고

단것과 뇌물과 회의에

빠진 사람들은

계속 늘고 있다. 

 

지구는 큰일 났다! *

 

* 목련 부처  

겨우내 주린 뱀에게 개구리가 제 몸을

통째로 바친다

온몸으로 공양의 禮를 치르는

장엄 현장에

목련 한 그루 서 있다

갑각의 묵은 가지마다 희고 뽀얀 젖들이

눈부시다

주린 입들에게 젖을 물린다 

 

도처에 生佛이다

 

* 단감  

단감 마른 꼭지는
단감의 배꼽이다
단감 꼭지 떨어진 자리는
수 만 봄이 머물고
왈칵,우주가 쏟아져 들어온 흔적
배꼽은 돌아갈 길을 잠근다
퇴로가 없다
이 길은 금계랍 덧칠한 어매의
젖보다 쓰고 멀고 험하다
상처가 본디 꽃이 진
자리인 것을

 

* 가을의 시  

가을이 오면

어제 굶은 자를 하루 더 굶게 하고

오래된 연인들을 헤어지게 하고

슬픈 자에겐 더 슬픔을 얹어 주소서.

부자에게선 재물을 빼앗고

학자에게서는 치매를 내리소서.

재물 없이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고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소서.

육산 선수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려

그 뼈와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수도자들과 사제들에게는

금욕의 덧없음을 알게 하소서.

전쟁을 계획 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해서

도처에 분쟁과 혁명과 전쟁이 일어나게 하소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써 온 자들은

서정시의 역겨움을 깨닫게 해서

이제 그만 붓을 꺾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집을 찍느라

열대우림이 사라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고요 속에서 시들고 마르고 바스러지는

저 무수한 멸망과 죽음들이

이 가을에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지를

부디 깨닫게 하소서. *

* 장석주시집[몽해항로]-민음사

 

* 가을 處士 

텃밭 구멍에선

뱀이 나오고 

장끼들은 암컷 부르며

숲에서 운다 

한 살 더 먹고

불혹(不惑)을 벗어난다 

다림질 잘하는 여자 하나를

가슴에 품고

잘 늙어갈 것이다

 


내가 가지 못한 길을
한사코 마음만이 분주히 간다

내가 가는 길에 마음이 없고
마음 가는 길에 내가 없으니
저녁답 가던 길을 버리고 말다

 

사랑
별뜨면
내 괴로움 잠들고

스쳐지나간 당신 보고 싶다고
허파꽈리에 가득 차는 기쁨으로
말하고 싶은

밤의 늑골들을 짚으며
입술 깨물고 싶도록
어둠을 지나간다

 

* 애인  

누가 지금
문밖에서 울고 있는가
인적 뜸한 산언덕 외로운 묘비처럼
누가 지금
쓸쓸히 돌아서서 울고 있는가
그대 꿈은
처음 만난 남자와
오누이처럼 늙어 한 세상 동행하는 것
작고 소박한 꿈이었는데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세상의 길들은 끝이 없어
한번 엇갈리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것
메마른 바위를 스쳐간
그대 고운 바람결
그대 울며 어디를 가고 있는가

내 빈 가슴에 한 등 타오르는 추억만 걸어놓고
슬픈 날들과 기쁜 때를 지나서
어느 먼 산마을 보랏빛 저녁
외롭고 황홀한 불빛으로 켜지는가

 

* 燈에 부침
1. 누이여, 오늘은 왼종일 바람이 불고
사람이 그리운 나는 짐승처럼 사납게 울고 싶었다
벌써 빈 마당엔 낙엽이 쌓이고
빗발들은 가랑잎 위를 건너뛰어 다니고
나는 머리칼이 젖은 채
밤 늦게까지 편지를 썼다
자정 지나 빗발은 흰 눈송이로 변하여
나방이처럼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유리창에 와 흰 이마를 부딪치곤 했다
나는 편지를 마져 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려 혼자 울었다

 

2. 눈물 그렁이는 누이여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저 고운 불의 모세관 일제히 터져
차고 매끄러운 유리의 내벽에
밝고 선명하게 번져가는 선혈의 빛
바람 비껴불 때마다
흔들리던 숲도 눈보라 속에 지워져 가고

조용히 드으이 심지를 돋우면
밤의 깊은 어둠 한 곳을 하얗게 밝히며
홀로 근심없이 타오르는 신뢰의 하얀 불꽃
어둠은 또 하나의 우주를 덮고 있다
슬퍼 말아라, 나의 누이여
많은 소유는 근심을 더하고
늘 배부른 자는 남의 아픔을 모르는 법
어디 있는가, 가난한 나의 누이여
등은 헐벗고 굶주린 자의 자유
등 밑에서 신뢰는 따뜻하고 마음은 넉넉한 법
돌아와 쓸쓸한 저녁이며 등을 켜자

 

*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보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더 자주 미소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정말 행복해" 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보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상처받는 일과 나쁜 소문
꿈이 깨어지는 것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벼랑 끝에 서서 파도가 가장 높이 솟아오를 때
바다에 온몸을 던지리라 *

 

* 겨울나무   

잠시 들렀다 가는 길입니다
외롭고 지친 발걸음 멈추고 바라보는
빈 벌판
빨리 지는 겨울 저녁 해거름

속에
말없이 서있는
흠없는 혼
하나
당분간 폐업합니다 이 들끓는 영혼을
잎사귀를 떼어 버릴 때
마음도 떼어 버리고
문패도 내렸습니다
그림자
하나
길게 끄을고
깡마른 체구로 서 있습니다
 

 

* 장석주시인

-1955년 충남 논산 출생

-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날아라 시간의 포충망에 붙잡힌 우울한 몽상이여]가 당선되어 등단

- 시집 [햇빛사냥][어떤 길에 관한 기억][크고 헐렁한 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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