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김명인 시 모음

효림♡ 2009. 9. 7. 08:16

* 어느날 내가 이곳에서 가을 강처럼 - 김명인     

내 몸을 지나가는 빛들을 받아서 혹은 지나간 빛들을 받아서

가을 강처럼 슬프게 내가 이곳에 서 있게 될 줄이야

격렬함도 없이 그냥 서늘하기만 해서 자꾸 마음이 결리는

그런 가을 강처럼

저물게 저물게 이곳에 허물어지는 빛으로 서 있게 될 줄이야

주름이 도닥도닥 맺힌 듯 졸망스러운 낯빛으로 어정거리게

될 줄이야  

 

* 동두천(東豆川) 1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혀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 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

 

* 찰옥수수

평해 오일장 끄트머리
방금 집에서 쪄내온 듯 찰옥수수 몇 묶음
양은솥 뚜껑째 젖혀놓고
바싹 다가앉은
저 쭈그렁 노파 앞
둘러서서 입맛 흥정하는
처녀애들 날 종아리 눈부시다
가지런한 치열 네 자루가 삼천원씩이라지만
할머니는 틀니조차 없어
예전 입맛만 계산하지
우수수 빠져나갈 상앗빛 속살일망정
지금은 꽉 차서 더 찰진
뽀얀 옥수수 시간들! *

 

* 너와집 한 채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 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 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 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 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민음사

 

* 편지  
다시 가을이다
돌틈 새에 숨는 몇 마리 도마뱀들
숨어도 보이는 우리들의 꼬리를
아프게 잘라버린다
친구여 너는 네 말을 할 수 있느냐?
계절을 받고 또 계절을 내주고 섰는
산 속으로 들어서며
가을이 가고 있군 가을이
풀 잎 위에 떨구는 산여치의 울음
바람은 개울 위에 새 주렴을 펴고 있다
뒤따라가며 우리도 또한 흩어질 것이냐?
묵묵히 견디고 섰는
더 괴로운 물풀도 만나고 싶다
괴로움도 이제는 괴로움이 아니라고
친구여 맨살에 끊임없이 감기는 물소리
홀로 흐를 때
물소리는 한결같이 차갑게 스민다 

 

* 안정사(安靜寺)

안정사 옥련암 낡은 단청의 추녀 끝
사방지기로 매달린 물고기가
풍경 속을 헤엄치듯
지느러밀 매고 있다
청동바다 섬들은 소릿골 건너 아득히 목메올 테지만
갈 수 없는 곳 풍경 깨어지라 몸 부딪쳐 저 물고기
벌써 수천 대접째의 놋쇠 소릴 바람결에
쏟아 보내고 있다
그 요동으로도 하늘은 금세 눈 올 듯 멍빛이다
이 윤회 벗어나지 못할 때 웬 아낙이
아까부터 탑신 아래 꼬리 끌리는 촛불 피워놓고
수도 없이 오체투지로 엎드린다
정향나무 그늘이 따라서 굴신하며
법당 안으로 쓰러졌다가 절 마당에 주저앉았다가 한다
가고 싶다는 인간의 열망이
놋대접풍으로 쩔렁거려서
그리운 마음 흘러 넘치게 하는
바다 가까운 절간이다 *

 

* 浮石寺  

언 바다에 뜬 浮漂들이 꺼진 분화구

주변을 헤매는 화산석 같다

다만 절간처럼 고요한 면벽, 창 너머로도

걸어서 하늘에 이르는 길 보이지 않을 뿐

한두 점 구름에도 박히며 새들 까마득하게 난다

어떤 때는 하루종일 말 한마디 못 했음을

불일듯 노을 지펴오르는 황혼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끼니때마다 한번쯤 내다보는

발전소 높은 굴뚝과 저기 고압선

눈 쌓인 이면 도로 철탑 언저리엔 오래 전부터

바퀴 주저앉힌 군용 트럭 한 대

갈 길 다 달리고도 떠나야 할

욕망이 남는 사람은 애처롭다

문을 열고 나서면

길이야 여기서도 어디로든 뻗어 있겠지만

어느 쪽을 엿보아도 반원의 길

끝없이 휘어져 돌아설 뿐 갈 곳이 없다

다만 내 떠나지 않은 길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기차가 오고 간다, 시베리아 저쪽

지구의 끝에 맞닿아 있다는 바람의 통로

부석사 무량수전을 보러 떠났던 그 밤에도

단양에서 영주까지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십 년 저쪽에서, 나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렸던가

여기까지 오기에는 한 길밖에 없었던가

날 수 없는 돌, 죄 어긋났던

사랑 뒤미처 깨닫는다 해도

부석사로 가는 길은 이미 끊겨 있다 *

 

* 이별 노래

잎진 숲길 지나와
그대마저 지우려 들판에 섰습니다
저녁 노을에 숨죽이는 구름 유난해도
강 건너 도시의 창들 이른 불 밝혀 한 날
저물고 있습니다
굽은 강 허리 흐려지는 배 한 척도 보입니다
세월이 왔다 간 흔적 아무데도 찾을 수 없지만
저다지 어둠에 웅크려 낯선 집들, 서로를 가두는
문들을 닫아겁니다
밤과 밤 사이로 길들여지며
켜켜의 날들, 그 부질없음으로 오한 날지라도
가는 길 더는 당신을 꿈꿔 아니 됩니다
우리 정 그러하지 아니하여
여기저기 맘 거둘 일 고통입니다
이 치욕의 세월조차 우리 몫이 아니라면
피고 지는 들풀의 철없는 보챔 왜 눈물입니까
이 땅의 임자들 아직 그대로인데
부는 바람에도 갈라쥐는 여린 피와 살, 뼈마디마다에
새기며 그대 아픈
이별입니다 *
 

 

* 천지간 
저녁이 와서 하는 일이란
천지간에 어둠을 깔아놓는 일
그걸 거두려고 이튿날의 아침 해가 솟아오르기까지
밤은 밤대로 저를 지키려고 사방을 꽉 잠가둔다
여름밤은 너무 짧아 수평선 채 잠그지 못해
두 사내가 빠져나와 한밤의 모래톱에 마주 앉았다  
이봐, 할 말이 산더미처럼 쌓였어
부려놓으면 바다가 다 메워질 거야
그럴 테지, 사방을 빼곡히 채운 이 어둠 좀 봐
망연해서 도무지 실마릴 몰라
두런거리는 말소리에 겹쳐
밤새도록 철썩거리며 파도가 오고
그래서 여름밤 더욱 짧다
어느새 아침 해가 솟아
두 사람을 해안선 이쪽저쪽으로 갈라놓는다
그 경계인 듯 파도가
다시 하루를 구기며 허옇게 부서진다

 

* 따뜻한 적막   

아직은 제 풍경을 거둘 때 아니라는 듯
들판에서 산 쪽을 보면 그쪽 기슭이
환한 저녁의 깊숙한 바깥이 되어 있다
어딘가 활활 불 피운 단풍 숲 있어 그 불 곁으로
새들 자꾸만 날아가는가
늦가을이라면 어느새 꺼져버린 불씨도 있으니
그 먼 데까지 지쳐서 언 발 적신들
녹이지 못하는 울음소리 오래오래 오한에 떨리라
새 날갯짓으로 시절을 분간하는 것은
앞서 걸어간 해와 뒤미처 당도하는 달이
지척 간에 얼룩 지우는 파문이 가을의 심금임을
비로소 깨닫는 일
하여 바삐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같은 하늘에서 함께 부스럭대는 해와 달을
밤과 죽음의 근심 밖으로 잠깐 튕겨두어도 좋겠다
조금 일찍 당도한 오늘 저녁의 서리가
남은 온기를 다 덮지 못한다면
구들장 한 뼘 넓이만큼 마음을 덥혀놓고
눈물 글썽거리더라도 들판 저쪽을
캄캄해질 때까지 바라봐야 하지 않겠느냐 
 

 

* 저 능소화

주황 물든 꽃길이 봉오리째 하늘을 가리킨다

줄기로 담벼락을 치받아 오르면 거기,  

몇 송이로 펼치는 생이 다다른 절벽이 있는지

더 뻗을 수 없어 허공 속으로

모가지 뚝뚝 듣도록 저 능소화

여름을 익힐 대로 익혔다

누가 화염으로 타오르는가, 능소화

나는 목숨을 한순간 몽우리째 사르는

저 불꽃의 넋이 좋다

가슴을 물어라, 뜯어내면 철철 피 흘리는

천근 사랑 같은 것,

그게 암 덩어리라도 불볕 여름을 끌고

피나게 기어가 그렇게 스러질

너의 여름 위에 포개리라 *

* 꽃시그림집[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랜덤하우스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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