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이기철 시 모음

효림♡ 2009. 9. 2. 08:07

*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 이기철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 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면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도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

 

* 숲

굴참나무는 상수리나무를

오리나무는 비옷나무를

등갈퀴는 청미래를

꿩비름은 삿갓풀을

모데미풀은 홀아비꽃대를

우산나물은 짚신나물을

부른다

부르는 소리에

내 귀가 먹먹하다 *

 

* 수직의 나무

나무들이 서 있는 수직의 문장 사이로 잘 조련된 바람이 지나간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생목(生木)들의 화첩

항상 높은 데 있는 구름의 제국은 쉽게 무너진다

단순한 생각을 뭉치며 물 흘러가고

검은 바위를 열어젖히고 들풀이 돋는다

짐승의 발과 내 공상은 늘 고전적이다

그러나 나무는 현재에 살고 있다

햇빛의 죽비 소리에 바위는 잠 깬다

들풀의 온기로 바위는 피가 돈다

모든 의문의 문을 밀고 사람들이 문밖으로 걸어 나오고

확신을 가진 계절은 제 가슴에 꽃을 피워 들고 들판을 건너간다

단순한 기쁨에도 즐거워지는 나무

그래서 나무는 잠마저 수직이다 *

 

* 꽃 이우는 시간

꽃 지는 것 보면 사랑도

짧아야 아름다움을 안다

아침에 붉다가 저녁에 검게 닫은 꽃

그 짧은 개화를 위해

여린 몸으로 한 해를 견뎠다는 것

사랑도 그처럼 붉었다가 쉬이 어두워져

씨앗처럼 흙에 묻혀 오래 견디는 일

꽃 이우는 것 보면 사랑도

이운 뒤 아름답다는 걸 깨닫는다 *

 

* 가을 우체국 
외롭지 않으려고 길들은 우체국을 세워놓았다
누군가가 배달해 놓은 가을이 우체국 앞에 머물때
사람들은 저마다 수신인이 되어
가을을 받는다
우체국에 쌓이는 가을 엽서
머묾이 아름다운 발목들
은행나무 노란 그늘이 우체국을 물들이고
더운 마음에 굽혀 노랗거나 붉어진 시간들
춥지 않으려고 우체통이 빨간 옷을 입고 있다
우체통마다 나비처럼 떨어지는 엽서들
지상의 가장 더운 어휘들이 살을 맞댄다
가을의 말이 은행잎처럼 쌓이는
가을엽서에는 주소가 없다

 

* 시월

잘 익었는지 하나만 맛보고 가려다가
온 들판 다 엎질러 놓고 가는 볕살

베짱이 귀뚜라미가 나도 좀 데려가 달라고
악다구니 쓰는 시월 

 

* 들꽃방석을 깔고 앉아 

누가 산과 들에 저절로 피는 꽃을 그만 피어라 하겠느냐

누가 마음과 마음에 피는 시를 그만 피라 하겠느냐

누가 산과 들에 핀 꽃 이름을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부를 수 있겠느냐

누가 시지와 문예지에 실린 시의 이름을 낱낱이 부를 수 있겠느냐

 

누가 산과 들에 핀 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꽃을 만질 수 있겠느냐

누가 문예지와 시지에 실린 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시를 고를 수 있겠느냐

누가 산과 들에 핀 꽃 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꽃을 딸 수 있겠느냐

누가 잡지와 시집에 실린 시 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시를 택할 수 있겠느냐

 

오늘도 나는 몇 편의 시를 잡지에 보내면서

저 많은 시 가운데 내 시가 어떤 빛깔을 발할 것인가를

저 숱한 시 가운데 내 시가 어떤 향기로 스밀 것인가를

두릅나무와 이팝나무 사이에서 연인의 이름 부르듯 생각한다

 

산과 들의 저 많은 꽃 가운데서

어느 꽃이 가장 향기로운가를 오래오래 생각하는

들꽃 방석을 깔고 앉은 오후 

 

나는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나팔꽃 새 움이 모자처럼 볼록하게 흙을 들어 올리는 걸 보면 나는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질까 두렵다

어미 새가 벌레를 물고 와 새끼 새의 입에 넣어주는 걸 보면 나는 세상이 너무 따뜻해질까 두렵다 

 

몸에 난 상처가 아물면 나는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저 추운 가지에 매달려 겨울 넘긴 까치집을 보면 나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이 도시의 남쪽으로 강물이 흐르고 강둑엔 벼룩나물 새 잎이 돋고 동쪽엔   살구꽃이 피고

서쪽엔 초등학교 새 건물이 들어서고 북쪽엔 공장이 지어지는 것을 보면

나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서문시장 화재에 아직 덜 타고 남은 포목을 안고 나오는 상인의 급한 얼굴을 보면

찔레꽃 같이 얼굴 하얀 이학년이 가방을 메고 교문을 들어가는 걸 보면

눈 오는 날 공원의 벤치에 석상처럼 부둥켜안고 있는 가난한 남녀를 보면

나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 세상 여리고 부드러운 것만 사랑한 셈이다

이제 좀 거칠어지자고 다짐한 것도 여러 번, 자고 나면 다시 제 자리에 와 있는 나는

아, 나는 이 세상 하찮은 것이 모두 애인이 될까 두렵다

 

* 외롭다고 말할 수 있는 힘  

누구도 함부로 외롭다고 말해선 안 된다

외로움을 사랑해 본 사람만이
외롭다고 말해야 한다

외로움을 저만치 보내놓고
혼자 앉아 외로움의 얼굴을 그려본 사람만이
외롭다고 말해야 한다
외로움만큼 사치스러운 것은 없다
그의 손으로 무지개를 잡듯이
외로움을 손으로 잡을 수 있어야
외롭다고 말할 수 있다
외로움의 가슴 속에 들어가
바알간 불씨가 되어보지 않는 사람은
외롭다고 말해선 안 된다
외롭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그 때, 한 방울 이슬처럼
외롭다고 말해야 한다 
 

 

* 아침 언어

저렇게 빨간 말을 토하려고
꽃들은 얼마나 지난밤을 참고 지냈을까
뿌리들은 또 얼마나 이파리들을 재촉했을까
그 빛깔에 닿기만 해도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저 뜨거운 꽃들의 언어

하루는 언제나 어린 아침을 데리고 온다
그 곁에서 풀잎이 깨어나고
밤은 별의 잠옷을 벗는다

아침만큼 자신만만한 얼굴은 없다
모든 신생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초록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아침 곁에서
사람을 기다려 보면 즐거우리라

내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꽃의 언어를 주고 싶지만
그러나 꽃의 언어는 번역되지 않는다
나무에서 길어낸 그 말은
나무처럼 신선할 것이다
초록에서 길어낸 그 말은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모음일 것이다 *

 

* 나무 같은 사람  

나무 같은 사람 만나면 나도 나무가 되어
그의 곁에 서고 싶다
그가 푸른 이파리로 흔들리면 나도 그의 이파리에 잠시 맺는
이슬이 되고 싶다

그 둥치 땅 위에 세우고
그 잎새 하늘에 피워 놓고도
제 모습 땅 속에 감추고 있는 뿌리 같은 사람 만나면
그의 안 보이는 마음 속에
돌 같은 방 한 칸 지어
그와 하룻밤 자고 싶다

햇빛 밝은 저자에 나가
비둘기처럼 어깨 여린 사람 만나면
수박색 속옷 한 벌 그에게 사주고
그의 버드나무 잎 같은 미소 한 번 바라보고 싶다

갓 사온 시금치 다듬어놓고
거울 앞에서 머리 빗는 시금치 같은 사람
접으면 손수건만하고 펼치면 저녁놀만한 가슴 지닌 사람
그가 걸어온 길 발에 맞는 평상화

늦은 밤에 혼자서 엽록색 잉크로 편지를 쓰는 사람
그가 잠자리에 들 때 나는 혼자 불켜진 방에 앉아
그의 치마 벗는 소리를 듣고 싶다
 

 

* 우수의 이불을 덮고 
오늘도 우리 아는 이웃들은 다 무사합니다
자주 손끝에서 덧나던 희망
오래 만져서 닳고 닳은 고통들은 잠들었습니다
누더기의 남쪽 산에 내 짐 같은 꽃들은 지고
안부없는 흰새는 내를 건너 날아갔습니다
만나지 못한 사람의 이름만 아직도 열병처럼 이마를
두근거리고 있습니다
흙 속에 묻힌 옥잠화 씨앗은 제 혼자 따뜻하고
우리가 가장 쓸쓸할 때 부를 이름 하나는
아직 가슴속에 남겨 두었습니다
그대 먼 길 가거던 돌아오지 마세요
그대 못질한 문패와 뜨락의 신발들 다 잘 있습니다
뒷날 부를 노래 한 소절 베개 맡에 묻어두고
우수의 이불을 덮고 오늘밤은 혼자 잠듭니다 *

 

* 부부  

이 세상 가장 비밀한 소리까지
함께 듣는 사람이 부부다
식탁에 둘러앉아 나란히 수저를 들고
밥그릇 뚜껑을 함께 여는 사람
이부자리 속 달걀만한 온기에도
고마워할 줄 알고
저녁놀 속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하루를 떠나보내는 사람

적금통장을 함께 지니고
지금은 떠나있어도 아이들 소식 궁금해하는 사람
언젠가 다가올 가을 으스름같은 노년과
죽음에 대해서도 함께 예비하는 사람
이 나무와 저 나무의 잎이 닿을 듯 닿지 않을 때
살닿음의 온기 속에 서로의 등을 뒤이며
머리카락 스쳐간 별빛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
이 나무와 저 나무처럼 가장 가까이 서서
먼 우레를 함께 듣는 사람 

 

* 별이 뜰 때  

나는 별이 뜨는 풍경을 삼천 번은 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별이 무슨 말을 국수처럼 입에 물고 이 세상 뒤란으로 살금살금 걸어오는지를 말한 적이 없다
별이 뜨기 전에 저녁쌀을 안쳐놓고 상추 뜯으러 나간 누이에 대해 나는 쓴 일이 없다
상추 뜯어 소쿠리에 담아 돌아오는 누이의 발목에 벌레들의 울음이 거미줄처럼 감기는 것을 말한 일이 없다
딸랑딸랑 방울을 흔들며 따라오던 강아지가 옆집 강아지를 만나 어디론가 놀러 가버린 그 고요함을 말한 일이 없다
바삐 갈아 넘긴 머슴의 쟁기에 찢겨 아직도 아파하는 산그늘에 대해,
어서 가야 하는데, 노오란 새끼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벌레를 잡지 못해 가슴을 할딱이는 딱새가 제 부리로 가슴 털을 파고 있는 이른 저녁을 말한 일이 없다
곧 서성이던 풀밭들은 침묵할 것이고 나뭇잎들은 다소곳해질 것이다
부엌에는 접시들이 달그락거리며 입 닫은 딱새의 말을 대신 해줄 것이다
별이 뜨면 사방이 어두워져 그때 막내 별이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문간으로 나올 거라는 내 생각은 틀림없을 것이다
별이 뜨면 너무 오래 써 너덜너덜해진 천 원짜리 지폐 같은 반달이 느리게 느리게 남쪽 산 위로 돋을 것이라는 내 생각은 틀림없을 것이다
별이 뜨면 벌들과 딱정벌레들이 둥치에서 안 떨어지려고 있는 힘을 다해 나무를 거머쥐고 있는 것을 어둠 속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별이 뜨면 귀뚜라미가 찢긴 쌀 포대에서 쌀 쏟아지는 소리로 운다고 터무니없는 말을 나는 한 마디만 더 붙이려고 한다
이것들이 다 별이 뜰 때, 별이 뜨면 생기는 일들이다

* 이기철시집[가장 따뜻한 책]-민음사 

 

* 이기철 시인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1972년 [현대문학] 등단, 1993년 김수영문학상,1998년 시와문학상 수상

-[청산행][열하를 향하여][가장 따뜻한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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