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 말의 힘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
* 모진 소리
모진 소리를 들으면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더라도
내 귀를 겨냥한 소리가 아니더라도
모진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쩌엉한다
온몸이 쿡쿡 아파온다
누군가의 온몸을
가슴속부터 쩡 금가게 했을
모진 소리
나와 헤어져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내 모진 소리를 자꾸 생각했을
내 모진 소리에 무수히 정 맞았을
누군가를 생각하면
모진 소리
늑골에 정을 친다
쩌어엉 세상에 금이 간다
*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비가 온다.
네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
비가 온다구!
나는 비가 되었어요.
나는 빗방울이 되었어요.
난 날개 달린 빗방울이 되었어요.
나는 신나게 날아가.
유리창을 열어둬.
네 이마에 부딪힐 거야.
네 눈썹에 부딪힐 거야.
너를 흠뻑 적실 거야.
유리창을 열어둬.
비가 온다구!
비가 온다구!
나의 소중한 이여.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
* 데이트
당신 앞에서
비틀거리기 싫어서
넘어졌었죠
넘어진 게 어이없어서
쫘악 뻗었죠
당신의 시선의 쇳물
쏟아졌어요
나는 로봇처럼
발딱 일어났어요
강철 얼굴을 천천히
당신께 돌렸어요
내 구두를 미끄러뜨린 게
무어겠어요?
* 나의 맹세
나는 역경을, 불운을, 고통을
따뜻이 영접하지 않겠다
울음소리로 미루어
까마귀는 참 속깊은 새인 듯싶기도 하지만
아, 비천하게도 나는, 아씨 체질인 것이다
처지는 비록
아씨를 모셔도 시원치 않을지라도
* 비
아, 저, 하얀, 무수한, 맨종아리들,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여들고 싶게 하는. *
* 비
저처럼
종종걸음으로
나도
누군가를
찾아 나서고
싶다.....*
* 비야, 그녀를 아물게 해라
그녀는 비를 바라본다
대기를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떨어지는 비
그녀는 빗방울을 바라본다
빗방울은 바닥에 떨어져 하얗게 부서진다
그녀의 눈은 빗방울을 흠뻑 빨아들이고
그녀의 코는 흠씬 비 냄새를 들이켠다
향기로운 비!
生을 간질이는 빗소리
비 앞에 가만히 멈춰선
텅 빈 그녀의 얼굴 속에서
그녀의 영혼이 비를 맞고 있다
친구와 북한산 자락을 오른다
나는 숨이 찰 정도로 빨리 걷고
친구는 느릿느릿
그의 기척이 이내 아득하다
나는 친구에게 돌아가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기를 몇 번, 기어이 친구가 화를 낸다
산엘 왔으면, 나무도 보고 돌도 보고
풀도 보고 구름도 보면서 걷는 법이지
걸어치우려 드느냐고
아하!
친구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걸으려는데
어느 새 획획 산을 오르게 되는 나다
땀을 뚝뚝 흘리며 바위에 앉아 내려다보면
멀리서 친구가 느릿느릿 올라온다
나무도 데리고 돌도 데리고
풀도 데리고 구름도 데리고
* 여름 저녁
조금쯤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을 듯한
먼 하늘에
태양이 벗어놓은 허물
둥실 떠 있다
조금쯤 바람 빠진 듯
맥없이 부푼 주홍빛 풍선
맥놀이 퍼지는 하늘
“그래, 이대로 이렇게 사는 거지, 뭐!”
버럭 중얼거리며
어리둥절하다
뭘?
몰라, 가슴 쓰리다
* 깊은 졸음
뒤로도 양옆으로도
벽을 훑내리는 비바람 소리
방충망에 걸러져
방 안 깊숙이 들이치는 빗가루들
등덜미에 잔소름으로 맺힌다
산란한 빗소리
속수무책
* 하늘꽃
날씨의 절세가인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이 텅 비는 것 같습니다
앞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에 걸려
뒷눈송이들이 둥둥 떠 있는
하늘까지 까마득한 대열입니다
저 너머 깊은 天空에서
어리어리한 별들이 빨려들어
함께 쏟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빨려들어
어디론가 쏟아져버릴 것 같습니다
모든 상념이 빠져나간 하양입니다
모든 소리를 삼키고
하얗게 쏟아지는 눈 오는 소리
나를 호리는 발성입니다
몇 걸음마다 멈춰 서
묵직해진 우산을 뒤집어 털어
길 위에 눈을 돌려줬습니다
계단골이 안 보이도록 쌓인 눈
아무 데나 딛고 올라가려니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옵니다
내 방에 들어서 문을 닫으니
호주머니 속에 눈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 조깅
후,후,후,후! 하,하, 하, 하!
후,후,후,후! 하,하, 하, 하!
후, 하! 후, 하! 후하! 후하! 후하! 후하!
땅바닥이 뛴다, 나무가 뛴다
햇빛이 뛴다, 버스가 뛴다, 바람이 뛴다
창문이 뛴다, 비둘기가 뛴다
머리가 뛴다
잎 진 나뭇가지 사이
하늘의 환한
맨몸이 뛴다
허파가 뛴다
하, 후! 하, 후! 하후! 하후! 하후! 하후!
뒤꿈치가 들린 것들아!
밤새 새로 반죽된
공기가 뛴다
내 生의 드문
아침이 뛴다
독수리 한 마리를 삼킨 것 같다 *
* 남산, 11월
단풍 든 나무의 겨드랑이에 햇빛이 있다. 왼편, 오른편.
햇빛은 단풍 든 나무의 앞에 있고 뒤에도 있다.
우듬지에 있고 가슴께에 있고 뿌리께에 있다.
단풍 든 나무의 안과 밖, 이파리들, 속이파리,
사이사이, 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가 있다.
단풍 든 나무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다.
단풍 든 나무가 한없이 붉고, 노랗고, 한없이 환하다.
그지없이 맑고 그지없이 순하고 그지없이 따스하다.
단풍 든 나무가 햇빛을 담쑥 안고 있다.
행복에 겨워 찰랑거리며.
싸늘한 바람이 뒤바람이
햇빛을 켠 단풍나무 주위를 쉴 새 없이 서성인다.
이 벤치 저 벤치에서 남자들이
가랑잎처럼 꼬부리고 잠을 자고 있다 *
* 묵지룩히 눈이 올 듯한 밤
이렇게 피곤한데
깊은 밤이어서
집 앞 골목이어서
무뚝뚝이 걸어도 되는 혼자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죽을 것같이 피곤하다고
피곤하다고
걸음, 걸음, 중얼거리다
등줄기를 한껏 펴고 다리를 쭉 뻗었다
이렇게 피곤한 채 죽으면
영원히 피곤할 것만 같아서
그것이 문득 두려워서
죽고 싶도록 슬프다는 친구여
죽을 것같이 슬퍼하는 친구여
지금 해줄 얘기는 이뿐이다
내가 켜 든 이 옹색한 전지 불빛에
生은, 명료해지는 대신
윤기를 잃을까 또 두렵다
* 어느 날 갑자기 나무는 말이 없고
햇살 아래 졸고 있는
상냥한 눈썹, 한 잎의 풀도
그 뿌리를
어둡고 차가운 흙에
내리고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만
그곳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무는 말이 없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
둘
(탄식과 허우적댐으로
떠오르게 하는)
이파리를
떨군다.
나무는 창백한 이마를 숙이고
몽롱히
시선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챙강챙강 부딪히며
깊어지는 낙엽더미
아래에. *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 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
* 시장에서
그를 위해 무얼 살까 둘러보았죠.
수줍은 제비꽃에 벗은 완두콩.
그에게는 아무짝에 소용없는 것.
그럼그럼 딸길 살까 바나날 살까?
아니면 익살맞은 쥐덫을 살까?
그를 위해 무얼 살까 둘러보았죠.
한 쾌의 말린 뱀, 목에 늘인 할아범.
아아아아 재밌어 이걸 사줄까?
뽀골뽀골 미꾸라지 시든 오렌지
아니면 특제실크덤핑넥타이.
아아아아 재밌어 이걸 사줄까?
복작복작 밀리며 걷는 내 손엔
한 쪽엔 아이스크림 한 쪽엔 풍선.
농담처럼 절뚝절뚝 뛰는 지게꾼.
그 뒤를 바싹 쫓아 빠져나왔죠.
주머니에 뭐가 있나 맞춰보아요.
바로바로 올림픽 복권이어요.
만약에 첫째로 뽑힌다면은
아아아아 재밌어 너무 재밌어
풍선처럼 그이는 푸우 웃겠죠. *
* 황인숙시인
-1958년 서울 출생
-1984년 [경향신문]신춘문예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등단, 1999년 [동서문학상] 수상, 2005년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슬픔이 나를 깨운다][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