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홍해리 시 모음

효림♡ 2009. 7. 31. 08:24

* 여름, 그 찬란한 허무 - 홍해리  

죽음을 앓던 고통도 허무도

뜨거운 태양 앞에선

한 치의 안개일 뿐

또 하나의 허탈과

어둠을 예비하고

폭군처럼 몰고 가는 자연의 행진

가을의 풍요론 황금 하늘을 위해

영혼의 불은 끝없이 타오르고

폭염으로 타는 집념의 숲

무성한 잎들의 요란한 군무소리

모든 생애를 압도하는

천국의 바람

일상의 타협과 미련을 거부하고

폭풍으로 파도로

새벽의 꿈을 걸르던

경험의 손가락

무거운 열매를 접목하고 있었다 

 

* 가을 들녘에 서서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 시월

 

가을 길은 시월이면
싸리꽃 꽃자리도
자질자질 잦아든 때
하늘에선 가야금 퉁기는 소리
팽팽한 긴장 속에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금빛 은빛으로 빛나는
머언 만릿길을
마른 발로 가고 있는 사람
보인다
물푸레나무 우듬지
까치 한 마리
투명한 심연으로, 냉큼
뛰어들지 못하고
온 세상이 빛과 소리에 취해
원형의 전설과 추억을 안고
추락
추락하고 있다

 

* 연가 - 지아(池娥)에게
맷방석 앞에 하고
너와 나 마주 앉아 숨을 맞추어
맷손 같이 잡고 함께 돌리면
맷돌 가는 소리 어찌 곱지 않으랴
세월을 안고 세상 밖으로 원을 그리며
네 걱정 내 근심 모두 모아다
구멍에 살짝살짝 집어넣고 돌리다 보면
손 잡은 자리 저리 반짝반짝 윤이 나고
고운 향기 끝 간 데 없으리니
곰보처럼 얽었으면 또 어떠랴 어떠하랴
둘이 만나 이렇게 고운 가루 갈아 내는데
끈이 없으면 매지 못하고
길이 아니라고 가지 못할까
가을가을 둘이서 밤 깊는 소리
쌓이는 고운 사랑 세월을 엮어
한 生을 다시 쌓는다 해도
이렇게 마주 앉아 맷돌이나 돌리자
나는 맷중쇠 중심을 잡고
너는 매암쇠 정을 모아다
서름도 아픔까지 곱게 갈아서
껍질은 후후 불어 멀리멀리 날리자
때로는 소금처럼 짜디짠 땀과 눈물도 넣고
소태처럼 쓰디쓴 슬픔과 미움도 집어 넣으며
둘이서 다붓 앉아 느럭느럭 돌리다 보면
알갱이만 고이 갈려 쌓이지 않으랴
여기저기 부딪치며 흘러온 강물이나
사정없이 몰아치던 바람소리도
추억으로 날개 달고 날아올라서
하늘까지 잔잔히 어이 열리지 않으랴
 

 

* 꽃다지꽃 

꽃에서 꽃으로 가는 완행열차
나른한 봄날의 기적을 울리며 도착하고 있다
연초록 보드란 외투를 걸친 쬐그마한 계집애
샛노랗게 웃고 있는 앙증맞은 몸뚱어리
누가 천불나게 기다린다고
누가 저를 못 본다고
포한할까 봐 숨막히게 달려와서
얼음 녹아 흐르는 투명한 물소리에, 겨우내내
염장했던 그리움을 죄다 녹여, 산득산득
풀어 놓지만 애먼 것만 잡는 건 아닌지
나무들은 아직도 생각이 깊어 움쩍 않고
홀로 울고 있는 초등학교 풍금소리 가득 싣고
바글바글 끓고 있는 첫사랑
꽃다지꽃

 

* 상사화(相思花)

내가

마음을 비워

네게로 가듯

너도

몸 버리고

마음만으로

내게로 오라

너는

내 자리를 비우고

나는

네 자리를 채우자

오명가명

만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가는 길이 하나이기 때문

마음의 끝이 지고

산 그늘 강물에 잠기우듯

그리움은

넘쳐넘쳐 길을 끊나니

저문저문 저무는 강가에서

보라

저 물이 울며 가는 곳

멀고 먼 지름길 따라

곤비한 영혼 하나

낯설게 떠도는 것을

 

* 설중매(雪中梅)  

창밖, 소리 없이 눈 쌓일 때

방안, 매화

소문없이 눈트네

몇 生을 닦고 닦아

만나는 緣인지

젖 먹던 힘까지, 뽀얗게

칼날 같이 긴, 겨울밤

默言으로 피우는

한 점 水墨

고승

사미니

한 몸이나

서로 보며 보지 못하고

寂滅, 바르르, 떠는

황홀한 寶宮이네

 

* 봄, 벼락치다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나무들은 소신공양을 하고 바위마다 향 피워 예불 드리는데 겨우내 다독였던 몸뚱어리 문 열고 나오는 게

춘향이 여부없다 아련한 봄날 산것들 분통 챙겨 이리저리 연을 엮고 햇빛이 너무 맑아 내가 날 부르는 소리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거늘 살피가 어디 있다고 새 날개 위에도 꽃가지에도 한자리 하지 못하고 잠행하는

바람처럼 마음의 삭도를 끼고 멍이 드는 윤이월 스무이틀 이마가 서늘한 북한산 기슭으로 도지는 화병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 홍해리시집[비타민 詩]-우리글 

 

* 홍해리(洪海里)시인

-충북 청원 출생

-1969년 시집 [투망도] 등단
-시집 [홍해리 시선] [봄, 벼락치다] [비타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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