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마종기 시 모음

효림♡ 2009. 7. 29. 08:05

*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 - 마종기  
오랫동안 별을 싫어했다. 내가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 때문인지

너무나 멀리 있는 현실의 바깥에서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안쓰러움이 싫었다

외로워 보이는 게 싫었다

그러나 지난 여름 북부 산맥의  높은 한밤에 만난 별들은 밝고 크고 수려했다 

이 담길 것같이 가까운 은하수 속에서 편안히 누워 잠자고 있는 맑은 별들의 숨소리도 정다웠다

사람만이 얼굴을 들어 하늘의 별을 볼 수 있었던 옛날에는

아무데서나 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

그러나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요즈음,  사람들은 더 이상 별을 믿지 않고  희망에서도 등을 돌리고 산다

그 여름 얼마 동안 밤새껏, 착하고 신기한 별밭을 보다가 나는 문득 돌아가신 내 아버지와 죽은 동생의

얼굴을 보고  반가운 이야기를 나누기 했다

사랑하는 이여
세상의 모든 모순 위에서 당신을 부른다
괴로워하지도 슬퍼하지도 말아라
순간적이 아닌 인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내게도 지난 몇 해는 어렵게 왔다
그 어려움과 지친 몸에 의지하여 당신을 보느니
별이여, 아직 끝나지 않은 애통한 미련이여
도달하기 어려운 곳에 사는 기쁨을 만나라
당신의 반응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문을 닫고 불을 끄고
나도 당신의 별을 만진다 *
 

* 마종기시집[이슬의 눈]-문학과지성사

 

* 꽃의 이유(理由)   

꽃이 피는 이유를

전에는 몰랐다.

꽃이 필 적마다 꽃나무 전체가

작게 떠는 것도 몰랐다.


꽃이 지는 이유도

전에는 몰랐다.

꽃이 질 적마다 나무 주위에는

잠에서 깨어나는

물 젖은 바람 소리.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누가 물어보면 어쩔까. *


* 꽃 한 송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면

나는 왠지 그저 눈물부터 나네

눈물 흘리는 내 마음 한 개로

간절한 꽃 한 송이 만들어 당신께 *

 

* 익숙지 않다

그렇다. 나는 아직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익숙지 않다.
  
강물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눈빛을 열고 매일 밝힌다지만
시들어가는 날은 고개 숙인 채
길 잃고 헤매기만 하느니.
  
가난한 마음이란 어떤 삶인지,
따뜻한 삶이란 무슨 뜻인지,
나는 모두 익숙지 않다.
  
죽어가는 친구의 울음도
전혀 익숙지 않다.
친구의 재 가루를 뿌리는
침몰하는 내 육신의 아픔도,
눈물도, 외진 곳의 이명도
익숙지 않다.
  
어느 빈 땅에 벗고 나서야
세상의 만사가 환히 보이고
웃고 포기하는 일이 편안해질까 *

* 마종기시집[하늘의 맨살]-문지

 

* 기적

추운 밤 참아낸 여명을 지켜보다
새벽이 천천히 문 여는 소리 들으면
하루의 모든 시작은 기적이로구나
지난날 나를 지켜준 마지막 별자리
환해오는 하늘 향해 먼 길 떠날 때
누구는 하고 싶었던 말 다 하고 가리
또 보세, 그래, 이런 거야, 잠시 만나고-
길든 개울물 소리 흐려지는 방향에서

안개의 혼들이 기지개 켜며 깨어나고
작고 여린 무지개 몇 개씩 골라
이 아침의 두 손을 씻어주고 있다
*

 

* 쓸쓸한 물

불꽃은
뜨거운 바람이 없다면
움직이는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불꽃이 그림으로 완성된
안정된 세상의 쓸쓸함.
내 고통의 대부분은
그 쓸쓸한 물이다.

 

나는 때때로
그날을 생각한다.
순결의 물을 두 손에 받들고
다가오던 발소리의 떨림.
가득 찬 물소리에
나는 몸을 씻고 싶었다.

 

떨지 않는 물은 단지
젖어 있는
무게에 지나지 않는다. *

 

* 노르웨이 폭포
네 얼굴과 내 얼굴이 겹치고 엉겨
한 개의 얼굴이 되는 곳을 아느냐.
내 목숨과 네 목숨이 서로 붙자고
한 개의 숨소리만 내는 곳을 아느냐.

우리가 살아온 길과 물을 모두 모으면
사무치게 오래된 흐린 항구가 되느니
가난한 마을 작은 집의 나이 든 아내를 보면
그 긴 여행을 어찌 젖은 과거라고만 부르리.

나도 한때는 정상만 주시하며 뛰었다.
병풍같이 깎아지른 절벽의 바위산들
흔들며, 고개 저으며 흔한 눈물도 흘렸지만
그 슬픔 다 씻어내고 폭포를 덮어가는 무지개.

그 무지개 몇 개 주머니 속에 간직하는 동안
폭포는 두 손 흔들며 나를 부르고 있네.
영성의 시원한 물로 세례를 받는 이 아침,
어디서 본 듯한 소리 내 혼을 넓게 열어주네 *

* 마종기시집[하늘의 맨살]-문지

 

* 강원도의 돌 
나는 수석(水石)을 전연 모르지만
참 이쁘더군,
강원도의 돌,
골짜기마다 안개 같은 물냄새
매일을 그 물소리로 귀를 닦는
강원도의 그 돌들,
참, 이쁘더군.

세상의 멀고 가까움이 무슨 상관이리.
물 속에 누워서 한 백년,
하늘이나 보면서 구름이나 배우고
돌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더군.

참, 이쁘더군,
말끔한 고국(故國)의 고운 이마,
십일월에 떠난 강원도의 돌. *

 

* 우화의 강 1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

 

* 밤 노래 4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바람 부는 언덕에서, 어두운 물가에서
어깨를 비비며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마른 산골에서는 밤마다 늑대들 울어도
쓰러졌다가도 같이 일어나 먼지를 터는 것이
어디 우리나라의 갈대들뿐이랴.

멀리 있으면 당신은 희고 푸르게 보이고
가까이 있으면 슬프게 보인다.
산에서 더 높은 산으로 오르는 몇 개의 구름, 
밤에는 단순한 물기가 되어 베개를 적시는 구름, 
떠돌던 것은 모두 주눅이 들어 비가 되어 내리고
내가 살던 먼 갈대밭에서 비를 맞는 당신, 
한밤의 어두움도 내 어리석음 가려주지 않는다. *

 

* 과수원에서 
시끄럽고 뜨거운 한 철을 보내고
뒤돌아본 결실의 과수원에서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내게 말했다.  
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난다.  

ㅡ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땅은 내게 많은 것을 그냥 주었다.  
봄에는 젊고 싱싱하게 힘을 주었고
여름에는 엄청난 꽃과 향기의 춤.  
밤낮없는 환상의 축제를 즐겼다.  
이제 가지에 달린 열매를 너에게 준다.  
남에게 줄 수 있는 이 기쁨도 그냥 받은 것.  
땅에서, 하늘에서, 주위의 모두에게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ㅡ내 몸의 열매를 다 너에게 주어
내가 다시 가난하고 가벼워지면
미미하고 귀한 사연도 밝게 보이겠지.  
그 감격이 내 몸을 맑게 씻어주겠지.  
열매는 음식이 되고, 남은 씨 땅에 지면
수많은 내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구나.  
주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 되는구나.  

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나기를. *

* 깨꽃

헤어져 살던 깨알들이 땅에 묻혀 자면서

향긋한 깻잎을 만들어내고,

많은 깻잎 속에 언제 작고 예쁜 흰 깨꽃을 안개같이 뽀얗게 피워놓고, 그 깨꽃 다 보기도 전에 녹녹한 깨알을 한 움큼씩 만들어 달아주는 땅이여. 깨알씨가 무슨 흥정을 했기에 당신은 이렇게 농밀하고 풍성한 몸을 주는가.

그런가 하면, 흐려지는 내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꽃씨가,

 

어떻게 이 뒤뜰에 눈빛 환해지는 붉은 꽃, 보라색 꽃의 연하고 가는 몸을 만드는가. 땅의 염료 공장은 어디쯤 있고 봉제 공장은 어디쯤에 있고 향료공장은 또 어디쯤에 있기에, 흰 바탕에 분홍 띠 엷게 두른 이 작은 꽃이 여기서 피어 웃고 있는가.
나이 들수록 남들이 다 당연하다 여기며 지나치는 일들이 내게는 점점 더 당연하지 않게 보이는 것은 내 분별력이 흐려져 가기 때문인가. 아무려나, 흐려져 가는 분별력 위에 선 신비한 땅이여, 우리가 언제 당신 옆에 가면 그때부터는 당신의 알뜰한 솜씨를 다 알아볼 수 있겠는가. 흙이 꽃이 되고 흙이 깨가 되는 그 흥겨운 요술을 매일 보며 즐길 수 있겠는가.

늘어만 가던 궁금증이 하나씩 해결되는 깨알 같은 눈뜸이여,

나는 오늘도 깨꽃 앞에 앉아 아른거리는 그 말을 기다리느니,

어느 날 내 몸도 깨꽃이 되면 당신은 내 말과 글이 드디어 향기를 가지게 된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찾아 헤매던 날들은 지나고 드디어 신선한 목숨이 된 나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 이동협지음[정원 소요]-디자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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