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길 - 김용택

효림♡ 2009. 7. 16. 08:52

* 길 - 김용택

 

지금

어디서 어디만큼 왔습니까. 또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여긴 어디고 한발 내디뎌 거긴 어디랍니까

바람 앞에 앉아 숲입니다. 바람 부는 숲이지요

이 길도 평지를 지나 산굽이를 돌고 고개를 넘어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겠지요

가본 길이 세상에 있기는 있을까요

길에는 노란 잔디나 푸른 잔디가 누워 있어도 좋고

발길에 잔 돌멩이들이 채여도 좋지요

돌멩이들은, 채이면 서로 부딪쳐 희게 눈을 뜨며 아침에 울지요

생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섭니다. 그러나 길은 닮아서

어디서 많이 본 듯도 한 나무들이 내 쪽으로 돌아섭니다

나무가 나무 뒤로 숨기도 하네요

저 모습이 어디서 본 듯도 하여 전혀 낯설지는 않지요

서 있는 나무들이 낯익다는 것은 생시라는 뜻이겠지요

사는 게 순간이지요. 바람이고, 티끌이지요. 뜻 없지요

때로 너무 느닷없고, 뜬금없고, 아슬아슬 무구하지요

그러나 감당 못한 슬픔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답니다

모르지요. 몰라서, 다 몰라도 나는 갈래요

인생도 사랑도 가면 막힌 듯 벼랑 끝이지만

한발 내디뎌 새 땅이 세상에서 오지요

천길 만길 허공속에 한발 디뎌 찾은 그 길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다가 끝내 이르지 못하고 죽었다던

오래된 그 무서운 길, 길이 없다는 그 사랑의 길을 가볼랍니다 *

 

* 김용택시집[수양버들]-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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