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반도주 - 김용택
한밤에 깨어나
꽃 만발한 지리산 골짜기를 뒤적이기 싫다
살구꽃도, 벚꽃도, 늦게 핀 매화꽃에게도 나를 들키기 싫다
섬진강 곁을 지나왔다
물때 낀 잔자갈밭을 지나는 물소리들 중 더러 깨어 있는 것들이 나를 알았다 한들
이 한밤 깨어 있는 것들은 데 슬픈 노래의
한 곡조도 틀지 못한다
한 치 앞을 밝히며 어둠속을 단숨에 달린다
터지려는 숨을 참고 참다가 구례 산동 지나 비탈길 올라체며
숨 몰아쉬고, 남원이다
꽃들은 피겠지
아! 끝모를 슬픔을, 가슴 밑바닥에서 복받쳐오는 슬픔을 너는 가졌느냐
하얀 버선발로 검은 바위를 훌훌 건너뛰어라
춘향아
물오른 광한루 수양버들 가지를 타고 내려와 한 잎 치맛단을 적시며
이 산 저 산 꽃이 피는 단가로
진정코 봄이 왔다고
어디다가 네 눈물을 다 쏟겠느냐
끝까지 차오른 울음을 참고 참아
어찌 노고단 고개 바라보며 핏대 세운
강도근* 목소리로 네 슬픔은 삼겠느냐
그리하여, 나는 세상의 끝에 와 있다
온몸으로 이 산을 치고 저 산을 때리며 부서지는
구륭폭포 물소리같이 흩어지는
내 외로움도, 내 슬픔도, 내 울음도, 그러나
나는 세상에 들키기 싫다 *
* 강도근 -- 동편제 소리꾼
* 김용택시집[수양버들]-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