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매화 겨울나기 - 최영철
그해 겨울 유배 가던 당신이 잠시 바라본 홍매화
흙 있다고 물 있다고 아무데나 막 피는 게 아니라
전라도 구례 땅 화엄사 마당에만 핀다고 하는데
대웅전 비로자나불 봐야 뿌리를 내린다는데
나는 정말 아무데나 막 몸을 부린 것 같아
그때 당신이 한겨울 홍매화 가지 어루만지며
뭐라고 하셨는지
따뜻한 햇살 내린다고
단비 적신다고
아무데나 제 속내 보이지 않는다는데
꽃만 피었다 갈 뿐
열매 같은 것은 맺을 생각도 않는다는데
나는 정말 아무데나 내 알몸 다 보여주고 온 것 같아
매화 한 떨기가 알아버린 육체의 경지를
나 이렇게 오래 더러워졌는데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같아
수많은 잎 매달고 언제까지 무성해지려는 나
열매 맺지 않으려고
잎 나기도 전에 꽃부터 피워 올리는
홍매화 겨울나기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아 *
* 최영철시집[일광욕하는 가구]-문학과지성사
* 다대포 일몰
해지는 거 보러 왔다가
해는 못보고
해지면서 울렁울렁 밟아놓고 간
바다의 속곳, 갯벌만 보네
해가 흘려 놓고 간 명백한 지문
어서 바닷물을 보내
현장검증 중인 지문을 지우지만
갯벌은 해가 남긴 길고 긴 증거를
온몸으로 사수하네
시부렁 지부렁 등을 밀어붙이며
그 지문에 다 쓰여 있다고
한 여인이 재빨리 와
이 과격한 문서를
저 혼자 읽고 숨기네
뒤꿈치로 쿡쿡 밟으며
쑥쑥 지우며
* 이 독성 이 아귀다툼
우울한 실직의 나날 보양하려고
부전 시장 활어 코너에서 산 민물 장어
건져놓고 주인과 천 원 때문에 실랑이하는 동안
녀석은 몇 번이나 몸을 날려 바닥을 포복했다
집이 가까워올수록 제 마지막을 알았는지
비닐 봉지 뚫고 새처럼 파닥였다
물 없는 바닥을 휘저으며
날자 날아오르자고
참기름 들끓는 냄비에서
꼿꼿이 고개 들고 나를 본다
한 번도 세상에 대가리 쳐든 적 없는 나를
두고 보자 두고 보자고
식도를 구불구불 심장을 쿵쿵
위장을 부글부글 들쑤시고 간다
이 독성 이 아귀다툼 나를 새롭게 할 것이다
마디마디 박히는
민물장어 부스러진 뼈의 원한
힘이 솟는다
다 부서지면 나는 날아오를 것이야 *
* 최영철시집[일광욕하는 가구]-문학과지성사
* 밤에
하늘로 가 별 닦는 일에 종사하라고
달에게 희고 동그란 헝겊을 주셨다
낮 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밤에 보면 헝겊 귀퉁이가
까맣게 물들어 있다
어두운 때 넓어질수록
별은 더욱 빛나고
다 새까매진 달 가까이로
이번에는 별이 나서서
가장자리부터 닦아주고 있다 *
* 최영철시집[그림자 호수]-창비,2003
그날 아침저녁 공양 잘 하시고
절마당도 두어 번 말끔하게 쓸어놓으시고
서산 해 넘어가자 문턱 하나 넘어
이승에서 저승으로 자리를 옮기신다
고무줄 하나 당기고 있다가 탁 놓아버리듯
훌쩍 떨어져 내린 못난 땡감 하나
뭇 새들이 그냥 지나가도록 그 땡감 떫고 떫어
참 다행이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헛물만 켜고 간 배고픈 새들에게
참 미안한 일이었다고 땡감은 생각하고
스님을 떨구어낸 감나무
이제 좀 홀가분해 팔기지개를 켜기 시작하고
저는 그것이 못 가득 꽃을 피우려는
연잎의 욕심인줄 알았습니다
제 자태를 뽐내기 위해
하늘 가득 내리는 햇살 혼자 받아먹고 있는
연잎의 욕심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연잎은 위로 밖으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아래로 안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직 덜 자라 위태위태해 보이는 올챙이 물방게 같은 것들
가만가만 덮어주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위로 밖으로 비집고 나오려고 서툰 대가리 내미는 것들
아래로 안으로 꾹꾹 눌러주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동란 때 그러하셨듯
산에서 내려온 아들놈 마루바닥 아래 숨겨두고
그 위에 눌러앉아 방망이질 하시던 앙다물던
모진 입술이란 걸 알았습니다
그렇게 그것들의 머리맡에서
꼬박 밤을 밝히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 노을 - 최영철
한 열흘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초승달 칼날이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내 가슴살을 스윽 벤다
누구든 함부로 기울면 이렇게 된다고
피 닦은 수건을 우리 집 뒷산에 걸었다 *
* 최영철시집[찔러본다]-문학과지성사
* 어느 날의 횡재
시장에 들어서며 만난 아낙에게 두부 한 모 사고
두부에게 잘게잘게 숨어든 콩 한 짐 얻고
주름투성이 꼬부랑 할멈에게 상치 한 다발 사고
푸른 밭뙈기 넘실대며 지나간
해와 바람의 입맞춤 한 아름 얻고
시장 돌아나오며 늘어선 아름드리 조선 소나무
어깨 두드려주는 덕담 한 마디씩 듣고
자리 못 구해 그 아래 보따리 푼 아지매
시들어가는 호박잎 한 다발 사고
호박이 넝쿨째 넝쿨째 내게로 굴러 들어오고
하루 공친 공사판 박씨 무어라 시부렁대는
낮술 주정 한 사발 얻어걸치고
아줌씨가 받아먹을 잘 달구어진 욕지거리
무단히 길 가던 내가 공으로 받아먹고
성난 볼때기 가만가만 어루만지는 저물녘 해
내 뒷덜미에 와서 편안히 눕고
내일 뜰 해는 저 산동네 입구 강아지 집에 먼저 와 있고
아무렴 그렇게 되로 주고 말로 받고
말로 주고 가마니로 얻고 *
어느 봄날 춘궁기 주막거리 외상값 떼먹고
깡마른 들판을 내팽개치고 나온
그들은 지금 인력시장 옆 구멍가게에서
주전부리가 한창이다 일당 놓치고
라면에 빵에 늦은 아침을 때우는데
마침 가는 빗줄기가 그들이 앉은 평상 위로 떨어졌고
초가을 가랑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 중 하나
에이 오늘도 공쳤다며 막걸리 서너 통 바닥에 늘어놓았다
일찍부터 줄 선 젊은 아이들 보며
오늘 또 공친 줄 벌써부터 알았던 중늙은이들이
입맛 다시며 엉덩이 당겨 앉으며
때마침 마누라에게 고해바칠 핑계거리가 되어준
가랑비가 고마웠던 것이다
먹다 만 라면 국물 동그란 파문으로 깨어나
주섬주섬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가던 훈김들이
빗줄기에 덜미가 잡혀 처음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오늘은 공친 날, 대포 한 잔 하는 사이
새우깡이 젖고 히끗하게 날선 머리카락이 젖고
어제도 그제도 땀을 받아먹지 못해 빳빳해진
작업복이 젖고 있었다 후줄근히 어깨 힘을 풀고
막걸리 두어 잔에 비는 땀처럼
둘러앉은 대여섯을 골고루 적셨다 젖을 만큼 젖자
한나절 가대기를 하고 난 몸처럼 모두 말수가 적어졌고
젤로 늙어 보이는 영감 하나
시키지도 않은 노랫가락을 뽑아낸 것이었다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금수강산 풍년이 왔네 지화 좋다 얼씨구나,
웬 느닷없는 풍년가냐고 머쓱해 하던 사내들
늦게 감 잡고, 노가다 일당은 흉년이라도
들판 나락은 풍년이라네 얼씨구절씨구 풍년이라네
미리 약속이나 한 듯 으쓱으쓱 모 심고
덩실덩실 벼 베는 어깨춤을 시작한 것이었다
* 쑥국 -아내에게
참 염치없는 소망이지만
다음 생에 딱 한번만이라도 그대 다시 만나
온갖 감언이설로 그대 꼬드겨
내가 그대의 아내였으면 합니다
그대 입맛에 맞게 간을 하고
그대 기쁘도록 분을 바르고
그대 자꾸 술 마시고 엇나갈 때마다
쌍심지 켜고 바가지도 긁었음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의 그대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고맙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아이 둘 온 기력을 뺏어 달아난
쭈글쭈글한 배를 안고
그래도 그래도
골목 저편 오는 식솔들을 기다리며
더운 쑥국을 끓였으면 합니다
끓는 물 넘쳐 흘러
내가 그대의 쓰린 속 어루만지는
쑥국이었으면 합니다
* 최영철(崔泳喆)시인
-1956년 경남 창녕 출생
-[지평]으로 문학활동,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2000년 백석문학상 수상
-시집 [개망초가 쥐꼬리망초에게][그림자 호수][호루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