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 - 박철
끈이 있으니 연이다
묶여 있으므로 훨훨 날 수 있으며
줄도 손길도 없으면
한낱 종잇장에 불과하리
눈물이 있으니 사랑이다
사랑하니까 아픈 것이며
내가 있으니 네가 있는 것이다
날아라 훨훨
외로운 들길, 너는 이 길로 나는 저 길로
멀리 날아 그리움에 지쳐
다시 한 번
돌아올 때까지 *
* 박철시집[사랑을 쓰다]-열음사
* 맞바람 아궁이에 솔가지 넣으며
청솔가지 긁어 넣으며
서울은 너무 혼잡한 것 같애요,라고
써 내려간 편지를 읽네
눈물이 나네
맞바람 아궁이에 앉아
갑자기 누구라도 찾아올 것 같은 해거름
솔가지 밀어 넣으며
당신은 얼마나 좋겠읍니까,라고
써 내려간 편지를 읽네
눈물이 나네
젖은 연기 내게로 밀려오는
맞바람 아궁이에 청솔가지 넣으면
눈물이 나네 *
* 박철시집[사랑을 쓰다]-열음사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가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 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
* 꽃잎을 열면
그대의 꽃잎을 열면 푸른 하늘
비 개인 맑은 날
붉게 타는 그대의 숲 속을 헤매이다
꽃잎을 열어 목을 적시면
어두운 세상
나만 홀로 서럽다 *
* 세시에 흰 눈이 내리네
흰 눈이 내린다
마당 가득 흰 눈이 내린다
누군 히말라야에 가서 초라한 너를 발견하였다는데
네시 약속을 위해 집을 나서는 길
차마 흰 눈 위에 발을 딛지 못하고
마당가에 섰다가 거대한 나를 보았다
함박꽃이 되어 내리는 올해의 첫눈
너를 찾든 나를 잃든 오늘은 비긴 날로 하자
그러니 우린 하나다
지금이라도 우연히 골목에서 만나면
함박꽃 한 술 떠 서로 먹여주며
아프게 살아온 지난 여름은 잊도록 하자
그래 그러라고
세시가 지나는데 흰 눈이 내린다
* 박철시집[불을 지펴야겠다]-문학동네
* 버리긴 아깝고
일면식이 없는
한 유명 평론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서명한 뒤 잠시 바라보다
이렇게까지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싶어
면지를 북 찢어낸 시집
가끔 들르는 식당 여주인에게
여차여차하여 버리긴 아깝고 해서
주는 책이니 읽어나 보라고
며칠 뒤 비 오는 날 전화가 왔다
아귀찜을 했는데 양이 많아
버리긴 아깝고
둘은 이상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뭔가 서로 맛있는 것을
주고받은
그런 눈빛을 주고받으며 *
* 그대에게 물 한잔
우리가 기쁜 일이 한두 가지이겠냐마는
그중의 제일은
맑은 물 한잔 마시는 일
맑은 물 한잔 따라 주는 일
그리고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 *
* 보석
싼 것이 편한 인생이 있다 팬티도 양말도 런닝구도
싼 것을 걸쳐야 맘이 편한 사람들이 있다
한 번 산 운동화를 사골 고듯 신고 다니는
그런 사람들이 보석처럼 지키는 한 가지가 있다
그렇게 싼 것을 걸침으로써 그들에게
밸런스를 맞추고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소중한 무언가가 하나씩은 있다
지금 나의 남루 속에
천금같이 숨겨져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청노새 눈망울처럼 절실한 그리움의 보석은 무엔가
무엔가 말이다
어제는 분명 긴 봄밤이었는데
오늘 잠을 깨니 단풍 이는 가을 새벽이었다
짧은 꿈속에서 조용히 흔들리던 붉은 떨림-
일장춘몽 속에 나 진정 세상 모두를 사랑하였으므로
내겐 세상 하나가 반짝이는 옥빛 구슬이었다
한없이 걸어들어가는 구슬문이었다
사랑은 덧없이 싼 가을 낙엽이었으나 나
오늘도 보석 같은 단 하나의 사랑을 따라간다 *
* 벽오동
잊는다 잊자 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사람의 정이다
황혼녘에 놓인 그림자처럼
벽오동 잎잎마다 정을 붙이고 있네
봐라 내가 뭐라고 했나
이렇게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지
나무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내가 몇 년째 청색의 몸으로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볼 때였다
그동안 나는 아무리 내가 막무가내로 느껴질 때에도
저 벽오동보단 낫지 하고 웃고 있었다
눈이 오면 눈을 쓰고 비가 오면 비를 듣는
나무의 부동자세를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지구가 기우뚱하는 바람에 놀라 일어나 하늘을 보니
짙푸른 나무가 옆으로 옆으로 걷고 있었다
걸어가 가까스로 손을 내밀어
산 너머 먼 이의 등을
만지고 있었다 *
* 박철시집[사랑을 쓰다]-열음사
* 꽃그림
새해가 오고 새봄이 오고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는 않으리
당신이 내 마음에 새겨 준 꽃그림 문신 하나
그 푸르른 자국을 지우진 못하리
누군들 좋아 어둔 골목길에 기대어 섰고
누군들 좋아 빈손 저어가며 사랑을 노래하랴
* 참외향기
늙으신 어머니가 깎아온 참외 한 접시
늙으신 어머니 참외 한쪽 들어 내미네
맑은 속살 흰 눈섭 받아들고 머뭇거리자
늙으신 어머니 어서 먹으라 말하네
늙으신 어머니 이제 잊었나
아주 오래전 더위가 뼛속까지 번지던 날
장맛비로 쓸고 간 인간사 이후
나 참외를 먹지 못하네
그때 그랬지
논길을 걸어 들길을 걸어
가다 가다 쉬던 곳 땡볕 속의 푸른 참외밭
이별을 앞둔 두 사람
낮은 원두막에 앉아 참외옷을 벗겼지
더위를 끌고 코끝에 번지던 참외향
사랑은 훗날 달콤한 향기로 남고
나는 더 이상 참외를 먹지 못하네
오늘도 다시 풋풋하게 살아오는 사람
며느리 삼으면 좋겠다던 그 여자를
늙으신 어머니는 벌써 잊으신 모양이네
어서 한점 들어봐라
늙으신 어머니 고운 손으로
그 여자 잊으라 참외 한쪽 코끝에 디미네
언젠가 내 가슴속을 떠나는 날
어머니도 늙고 나도 늙고 그 여자도 늙어
세상은 달콤한 참외향만 남겠네
*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한다 해도
내가 산다는 것은
오직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살아 있는 동안 나는 당신을 사랑할 것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없음을 슬퍼하지 말자
우리 영원히 헤어질 수 없음을 슬퍼하자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한다 해도
사랑은 쓸쓸한 등대지기의 하루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죽어간다는 것 *
* 박철시인
-1960년 서울 출생
-창비에 [김포]외 15편의 시를 발표
-시집 [김포행 막차][너무 멀리 걸어왔다][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