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박형준 시 모음

효림♡ 2009. 11. 30. 08:16
* 빛의 소묘 - 박형준   

누가

발자국 속에서

울고 있는가

물 위에

가볍게 뜬

소금쟁이가

만드는

파문 같은

 

누가

하늘과 거의 뒤섞인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가

편안하게 등을 굽힌 채

빛이 거룻배처럼 삭아버린

모습을 보고 있는가

누가

고통의 미묘한

발자국 속에서

울다 가는가 *

 

* 이 저녁에

황혼이여, ㅡㅡ저녁 하늘의 수술 자국이여, ㅡㅡ꿈이 태어나는 거소(居所)여
이 저녁에 또 하나 별빛이 통증처럼 뻗어나온다
나는 말하지 않으련다, 아물지 않는 상처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한없이 느릿느릿한 걸음걸이가
향기를 안으로 익혀 포도송이로 꽉찬 포도나무밭이
밀짚 다발 훈훈한 헛간이

태양이 자박자박 걸어들어간 숲속에 난 사잇길로
농부가 걸어나온다 맑은 혓바닥 같은 이슬이 맺힌
나뭇잎 사이로, 기적처럼
소방울 소리가 남아 한참 울리고 그때마다
상처받는 사물들 붉은 속살이 하늘에 가득 돋아오른다

밥 타는 냄새 속에
둥글게 모여앉아 기다리는 가족(家族)들
굴뚝에 오르는 연기를 따라가면
밥상처럼 차려져 있는 달
먼 집, 대답 없는 날들이 대문이 빼곰 열린 마당
서늘한 우물에 어지럽게 떠 있다 *

 

* 빗소리

내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여자처럼


어느 술집

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거의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술잔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던

그 여자처럼

투명한 소주잔에 비친 지문처


창문에 반짝이는

저 밤 빗소리 *

 

* 어린 시절

저녁을 굶고 지붕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다
삼십 촉 전등에 뜰 앞 나무의 풋대추가 비치는데
오는 사람은 없고 오는 비만 있는 저문 집
아궁이에서 저 홀로 타는 장작 소리
설핏 잠이 든 사이 후두둑
초롱초롱한 풋대추 한 대접 지붕에 구르는데
밤비에 글썽이며 빛을 내는 옹기들처럼 *

 

* 옛집으로 가는 꿈   

소 잔등에 올라탄 소년이

뿔을 잡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땅거미 지는

들녘

소가 머리를 한번 흔들어

소년을 깨우려 한다

수숫대 끝에 매달린 소 울음소리

어둠이 꽉 찬 들녘이 맑다

마을에 들어서면

소년이 사는 옴팍집은

불빛이 깊다

소는 소년의 숨결에 따라

별들이 뜨고 지는 계절로 들어선다 *

 

* 이별

일주일에 한번씩 고향을 스치는
이 길
명예는 흰 날개를 갖지 못한다
 
아침 일찍 용산역에서 기차 타고
아이들 앞에서 서려 책에 밑줄 긋다가 잠이 든다
누가 흔들어 깨운 것 아닌데 눈이 떠지는 마음
 
고향역 가로등 밑 거미줄에
안개가 짜놓은 구슬을 설핏 본 것 같다
汽笛이 고향집 담벼락을 울리는가
 
월요일마다 고향을 아침저녁 차창으로 본다
흰 날개가 부질없이 와서 부서진다
고향에 와도 고향에 내리지 못하는 이의 이별 *
 
* 지평(地平)
석유를 먹고 온몸에 수포가 잡혔다
옴팍집에 살던 때였다
아버지 등에 업혀 캄캄한
빈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읍내의 병원은 멀어
겨울바람이 수수깡 속처럼 울었다
들판의 어디쯤에서였을까
아버지는 나를 둥근 돌 위에 얹어놓고
목의 땀을 씻어내리고 있었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그 풍경을
실제라고 믿고 살았다
삶이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들판에 솟아 있는 흰 돌을
빈 터처럼 간직하며 견뎠다
마흔을 앞에 두고 나는 이제 그것이
내 환각이 만들어낸 도피처라는 것을 안다
달빛에 바쳐진 아이라고
끝없는 들판에서 나는 아버지를 이야기 속에 가둬
내 설화를 창조하였다
호롱불에 위험하게 흔들리던
옴팍집 흙벽에는 석유처럼 家系가
속절없이 타올랐다
지평을 향한 生이 만든
겨울밤의 환각 *
 
* 바닥에 어머니가 주무신다 

침대에 앉아, 아들이 물끄러미
바닥에 누워 자는 어머니를 바라본다
듬성듬성 머리칼이 빠진 숱 없는 여인의 머리맡
떨기나무 사이에서 나타난 하느님이
서툴게 밑줄 그어져 있다, 모나미 볼펜이
펼쳐진 성경책에 놓여 있다
침대 위엔 화투패가 널려 있고
방금 운을 뗀 아들은 패를 손에 쥔다
비오는 달밤에 님을 만난다

생활이 되지 않는 것을 찾아
아들은 밤마다 눈을 뜨고
잠결에 앓는 소리를 하며
어머니가 무릎을 만지고
무더운 한여름밤
반쯤 열어논 창문에 새앙쥐 꼬리만한 초생달

들어온다, 삶이란
조금씩 무릎이 아파지는 것
가장 가까운 사람의 무릎을
뻑뻑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저 여인은 무릎이 비어 있다

한달에 한번 시골에서 올라와
밀린 빨래와 밥을 해주고
시골 밭 뒤 공동묘지 앞에 서 있는 아그배나무처럼
울고 있는 여인
어머니가 기도하는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
가슴을 찢어라 그래야 네 삶이 보인다, 고
올라올 때마다 일제시대 언문체로 편지를 써놓고 가는
가난한 여인, 새벽 세시에 아들은
혼자 화투패를 쥐고 내려다보는 것이다

불타는 떨기나무는 이미 꺼진 지 오래
불길에 하나도 상하지 않던
열매들은 모두 어디론가 흩어졌지만
일찍 바닥에서 일어난 어머니가
침대 위의 화투를 치우고
모로 누운 서른셋 아들의 머리를 바로 뉘어주고
한시간 일찍 서울역에 나가 기차를 기다린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그 시각
밭 갈 줄 모르는 아들의 머리맡에
놓인 언문 편지 한장

"어머니가 너잠자는데 깨수업서 그양 간다 밥잘먹어라 건강이 솟애내고 힘이 잇다"


* 가구(家具)의 힘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 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家具)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家具)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 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ㅡ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가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家具論)을 펼쳤다. *

 

* 파도리에서
여자는 내 숨냄새가 좋다고 하였다
쇄골에 입술을 대고
잠이 든 여자는
죽지를 등에 오므린 새 같았다

끼루룩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밤새 파도 속에서
물새알들이 떠밀려 왔다
 
* 입술
봄날 대낮
공기의 서랍을 열고
새로운 세상을 냄새 맡아요
따끈하게 데워진 술이
이슬로 내리는 햇살 사이 걸어갈 때
입술로만 말을 해봅니다
미래의 문들이 달린 창공을 향해
뿔나팔을 분답니다
가냘픈 바람의 허리를 붙잡고
당신의 귀밑에 부어 넣어지는
밀어의 전언을 느껴보세요
거리를 향해 심호흡을 하고
조율한 휘파람을 날려 보냅니다
 
당신의 옷자락에 살랑이는,
입술의 언어를 느껴보세요 *
 

* 저곳 
空中이란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

공중이라는


뼛속이 비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새떼 *

 

* 나무를 붙잡고 우는 여자
언제나 밤이 오고, 잎들의 지문이
선명해지는 밤길을 걸어간다
지난날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는 열매의 맛이
아려온다, 꽃은 찢긴 살처럼 빛난다
새벽 두 시에 나무를 붙잡고 우는 여자
머리 위에 얹혀진 찬 달 *

 

* 무덤 사이에서

내가 들판의 꽃을 찾으러 나갔을  때는

첫서리가 내렸고,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였다

추수 끝난 들녘의 목울음이

하늘에서 먼 기러기의 항해로 이어지고 있었고

서리에 얼어붙은 이삭들 그늘 밑에서

별 가득한 하늘 풍경보다 더 반짝이는 경이가

상처에 찔리며 부드러운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내가 날려 보낸 생의 화살들을 줍곤 했었다

내가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영혼의 풍경들은 심연조차도 푸르게 살아서

우물의 지하수에 떠 있는 별빛 같았다

청춘의 불빛들로 이루어진  은하수를 건지러

자주 우물 밑바닥으로 내려가곤 하였다

겨울이 되면, 얼어붙은 우물의 얼음 속으로 내려갈수록 피는 뜨거워졌다

땅 속 깊은 어둠 속에서 뿌리들이

잠에서 깨어나듯이, 얼음 속의 피는

신성함의 꽃다발을  엮을 정신의 꽃씨들로 실핏줄과 같이 흘렀다

지금 나는 그 징표를 찾기 위해

벌거벗은 들판을 걷고 있다

논과 밭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 무덤들은 매혹적이다

죽음을 격리시키지 않고 삶을 껴안고 있기에

둥글고 따스하게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껴안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봉분들은 밥그릇을 닮았다

조상들은 죽어서 산사람들을 먹여 살릴 밥을 한상 차려놓는 것인가

내가 찾아 헤매다니는 꽃과 같이 무덤이 있는 들녘

산 자와 죽은 자가 연결되어 있는

밥공기와 같은 삶의 정신

푸르고 푸른 무덤이 저 들판에 나 있다

찬 서리가 내릴수록 그 속에서 잎사귀들이 더 푸르듯이

내가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모랐을 때 나를 감싸던 신성함이

발 가운데 숨 쉬고 있다

어린아이들 부산을 떨며 물가와 같은 기슭에서 놀고

농부들이 밭에서 일하다가 새참을 먹으며

죽은 조상들과 후손의 이야기를 나누던 저 무덤

그들과 같이 노래하고 탄식하던 그 자취를 따라

내 생이 제 스스로를 삼키는 이 심연 속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겨울이 되면, 저 밭가의 무덤 사이에 누워

봉분들 사이로 얼마나 밝은 잠이 흘러가는지

아늑한 그 추위들을 엮어 정신의 꽃다발을

무한한 죽음에 바치리라

나는 심연들을 환하게 밝히는 한순간의 정적 속에서

수많은 영혼들로 이루어진 은하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내려다보던 지하수의 푸른빛을

추위 속에서 딴딴해진 그 꽃을 캐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리라 *

 

*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들려줄 게 없는
봄 저녁
나는 바람 냄새 나는 머리칼
거리를 질주하는 짐승
짐승 속에 살아 있는 영혼
그늘 속에서 피우는
회양목의 작은 노란 꽃망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꺼풀에 올려논 지구가 물방울 속에서
내 발밑으로 꺼져가는데
하루만 지나도 눈물 냄새는 얼마나 지독한지
우리는 무사했고 꿈속에서도 무사한 거리
질주하는
내 발 밑으로 초록의 은밀한 추억들이
자꾸 꺼져가는데 *

 

* 박형준시인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家具의 힘]당선, 제15회 동서문학상, 2009년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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