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술 시 모음

효림♡ 2009. 11. 30. 08:25
* 반성 16 - 김영승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

 

* 만날 때마다 - 이성부  

만나면 우리

왜 술만 마시며

저를 썩히는가.

저질러 버리는가.

 

좋은 계절에도

변함없는 사랑에도

안으로 문 닫는

가슴이 되고 말았는가.

 

왜 우리는 만날 때마다

서로들 외로움만 쥐어뜯는가.

감싸주어도 좋을 상처,

더 피 흘리게 하는가.

 

쌓인 노여움들

요란한 소리들

거듭 뭉치어

밖으로 밖으로 넘치지도 못한 채..... *

 

* 차라리 - 박정만  

이 목숨이 차라리

냇가의 개밥풀꽃으로 하얗게 피어나

한 철만 살다가 핑그르르 꽃바람에

모가지를 툭 꺾고 사라졌으면

 

뉘우침은 이제 한 잎도 안 남았어. *

 

* A Drinking Song -by William Butler Yeats
Wine comes in at the mouth
And love comes in at the eye;
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Before we grow old and die.
I lift the glass to my mouth,
I look at you, and I sigh.

 

술은 입으로 흘러들고

사랑은 눈으로 흘러든다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알게 된 진실은 그것 뿐

나는 술잔 들어 입에 대고

그대글 바라보며 한숨짓는다 *

 

* 김육(金堉)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을 부르시소
초당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를 청하옴세
백년간 시름 없을 일을 의논코저 하노라 

 
* 黃喜

대추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뜻드르며
벼 뷘 그루에 게는 어이 나리는고
술 익자 체장사 돌아가니 아니먹고 어이리 

 

* 정철 - 장진주사(將進酒辭)

술 한 잔 먹새그려 또 한 잔 먹새그려

꽃을 꺾어 술잔 수를 꽃잎으로 셈하면서 끊임없이 먹새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으로 덮어서 졸라매고 가든 아름답게 꾸민 상여를 사람들이 울며 뒤따르든

억새, 속새, 떡깔나무, 백양숲(무덤)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굵은 눈, 소슬바람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할까?

하물며 원숭이가 무덤 위에서 휘파람 불 때, 뉘우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 이정보 

꽃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네
꽃피자 달밝아 술얻으면 벗 생각하네
언제면 벗이랑 꽃아래서 완월장취(玩月長醉)하리오


* 소주 한잔 했다고 하는 얘기가 아닐세 - 백창우

울지 말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 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개똥 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 나서지
바람이 차다고, 고단한 잠에서 아직 깨지 않았다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산다는 건, 참 만만치 않은 거라네
아차 하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망가지기 십상이지
화투판 끗발처럼, 어쩌다 좋은 날도 있긴 하겠지만
그거야 그때 뿐이지
어느 날 큰 비가 올지, 그 비에
뭐가 무너지고 뭐가 떠내려갈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것이지
개똥 같은 희망이라도 하나 품고 사는 건 행복한 거야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
자, 한잔 들게나
되는 게 없다고, 이놈의 세상
되는 게 좆도 없다고
술에 코 박고 우는 친구야

 

술이나 먹게 - 백창우
술이나 먹게
장마도깨비 여울 건너가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잔이나 비우게
자낸 다 나쁜데 그게 가장 나뻐
이러니 저러니 해봐야 뭐가 달라지겠나
괜히 귀만 더러워지지
몸으로 나설 게 아니라면
몸으로 부딪쳐 깨뜨릴 게 아니라면 말하지 말게
말 많은 집은 장 맛도 쓰다고 우리 어머니가 그러셨네
말로야 못할 게 뭐 있나
이놈의 세상 말 몇마디에 좋아질 것 같았으면
벌서 좋아졌지
자네 요즘 시인이 얼마나 많은지 아나
개나 소나 다 시를 쓰는데
세상을 왜 늘 이 모양인지 정말 모르겠네
자, 술이나 먹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내 잔이나 받게 

* 봄은 소주를 마신다 - 이은채  

납죽납죽 받아 마신 낮술에
취기가
물오르듯

내 아랫도리를 은밀히 더듬고 있다

 

봄은 소주를 마신다

 

저기, 저, 먼 데 산골짜기 아래
복사꽃 불콰히 부풀어오르는 구릉이 구렁이 같이
산의 가랑이 속으로 꿈틀, 꿈틀
기어들고 있다

 

* 장수막걸리를 찬양함 - 박찬일
거울은 빈털터리다
우주도 빈털터리다
우주라는 말도 빈털터리다
빈털터리도 빈털터리다
막걸리도 빈털터리다
막걸리가 맛있다

 

아, 막걸리가 맛있습니다 *

 

* 막소주라도 한 잔 - 나태주  
막소주라도 한 잔 처억 걸치고 나면
한오백년이나 어랑타령 같은 노래 듣고 싶어진다
젊고 이쁜 여자가 아니라 얼금뱅이* 중년 여자
조금은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듣고 싶어진다
* 얼금뱅이: 곰보, 마마자국


* 숭어회 한 접시 - 안도현  

눈이 오면, 애인 없어도 싸드락싸드락 걸어갔다 오고 싶은 곳

눈발이 어깨를 치다가 등짝을 두드릴 때

오래 된 책표지 같은 군산(群山), 거기

어두운 도선장 부근


눈보라 속에 발갛게 몸 달군 포장마차 한 마리

그 더운 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라

갑자기, 내 안경은 흐려지겠지만

마음은 백열 전구처럼 환하게 눈을 뜰 테니까


세상은 혁명을 해도

나는 찬 소주 한 병에다

숭어회 한 접시를 주문하는 거라

밤바다가, 뒤척이며, 자꾸 내 옆에 앉고 싶어하면

나는 그날 밤바다의 애인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이미 양쪽 볼이 불콰해진

바다야, 너도 한잔할래?

너도 나처럼 좀 빈둥거리고 싶은 게로구나

강도 바다도 경계가 없어지는 밤

속수무책, 밀물이 내 옆구리를 적실 때


왜 혼자 왔냐고

조근조근 따지듯이 숭어회를 썰며

말을 걸어오는 주인 아줌마, 그 굵고 붉은 손목을

오래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라

나 혼자 오뎅 국물 속 무처럼 뜨거워져

수백 번 엎치락뒤치락 뒤집혀보는 거라

 

* 한 잔 술 - 오상순

나그네 주인이여 평안하신고
곁에 앉힌 술단지 그럴 법허이
한 잔 가득 부어서 이리 보내게
한 잔 한 잔 또 한 잔 저 달 마시자
오늘 해도 저물고 갈 길은 머네
꿈같은 나그넷길 멀기도 허이!

나그네 주인이여 이거 어인 일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끝도 없거니
심산유곡 옥천(玉泉)샘에 홈을 대었나
지하 천 척 수맥에 줄기를 쳤나
바다는 말릴망정 이 술단지사
꿈같은 나그넷길 멀기도 허이!

나그네 주인이여 좋기도 허이
수양(垂楊)은 말이 없고 달이 둥근데
한 잔 한 잔 또 한 잔 채우는 마음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비우는 마음
길가)에 피는 꽃아 서러워마라
꿈같은 나그넷길 멀기도 허이!

 

나그네 주인이여 한 잔 더 치게

한 잔 한 잔 또 한 잔 한 잔이 한 잔

한 잔 한 잔 또 한 잔 석 잔이 한 잔

아홉 잔도 또 한 잔 한 잔 한없어

한없는 잔이언만 한 잔에 차네

꿈같은 나그넷길 멀기도 허이!

나그네 주인이여 섧기도 허이
속 깊은 이 한 잔을 누구와 마셔
동해바다 다 켜도 시원치 않을
끝없는 나그넷길 한 깊은 설움
꿈인 양 달래보는 하염없는 잔

꿈같은 나그넷길 멀기도 허이! *

* 오상순시집[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시인생각,2012

 

* 다시 술잔을 들며 - 정현종
이 편지를 받는 날 밤에 잠깐 밖에 나오너라
나와서 밤하늘의 가장 밝은 별을 바라보아라
네가 그 별을 바라볼 때 나도 그걸 보고 있다
(그 별은 우리들의 거울이다)
네가 웃고 있구나, 나도 웃는다
너는 울고 있구나, 나도 울고 있다 

 

* 낮술 - 정현종 

하루여, 그대 시간의 작은 그릇
아무리 일들로 가득차 덜그럭거린다 해도
신성한 시간이여, 그대는 가혹하다
우리는 그대의 빈 그릇을
무엇으로든 채워야 하느니.
우리가 죽음으로 그대를 배부르게 할 때까지
죽음이 혹은 그대를 더 배고프게 할 때까지
신성한 시간이여
간지럽고 육중한 그대의 손길.
나는 오늘 낮의 고비를 넘어가다가
낮술 마신 그 이쁜 녀석을 보았다
거울인 내 얼굴에 비친 그대 시간의 얼굴
시간이여,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그대.
낮의 꼭대기에 있는 태양처럼

비로소 낮의 꼭대기에 올라가 붉고 뜨겁게
취해서 나부끼는 그대의 얼굴은
오오 내 가슴을 메어지게 했고
내 골수의 모든 마디들을 시큰하게 했다
낮술로 붉어진
아, 새로 칠한 뼁끼처럼 빛나는 얼굴.
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
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
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

* 정현종시집[고통의 祝祭]-민음사,1974

 

* 술 노래 - 정현종
물로 되어 있는 바다
물로 되어 있는 구름
물로 되어 있는 사랑
건너가는 젖은 목소리
건너오는 젖은 목소리

우리는 늘 안 보이는 것에 미쳐
病을 따라가고 있었고
밤의 살을 만지며
물에 젖어 물에 젖어
물을 따라가고 있었고

눈에 불을 달고 떠돌게 하는
물의 香氣
불을 달고 흐르는
원수인 물의 향기여
* 정현종시집[고통의祝祭]-민음사

* 주막(酒幕)에서 - 천상병 

ㅡ도끼가 내 목을 찍은 그 훨씬 전에 내 안에서 죽어간 즐거운 아기를(장 주네) 

골목에서 골목으로
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순하게 마련인가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가는데
할머니 등 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 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빡 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이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 천상병시집[주막에서]-민음사 

 

* 파장 -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 신경림시집[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랜덤하우스 

 

* 주점일모(酒店日暮) - 김종길
불빛 노을
이제 쇠처럼 식어가고

황량한 나의 청춘의 일모(日暮)를
어디메 한구석
비가 내리는데
맨드라미마냥 달아오른 입술이
연거퍼 들이키는 서느런 막걸리

진실로 나의 젊음의 보람이
한잔 막걸리에 다했을 바에

내 또 무엇을
악착하고 회한하고 초조하랴--
무수히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며
창연한 노을 속에
내 다시 거리로 나선다

 

* 막걸리 - 최영철 

쌀뜨물 같은 이것
목마른 속을 뻥 뚫어 놓고 가는 이것
한두 잔에도 배가 든든한 이것
가슴이 더워져 오는 이것
신 김치 한 조각 노가리 한 쪽
손가락만 빨아도 탓하지 않는 이것
허옇다가 폭포처럼 콸콸 쏟아지다가
벌컥벌컥 샘물처럼 밀려들어오는 이것
한 잔은 얼음 같고 세 잔은 불 같고
다섯 잔 일곱 잔은 강 같고
열두어 잔은 바다 같아
둥실 떠내려가며 기분만 좋은 이것
어머니 가슴팍에 파묻혀 빨던
첫 젖맛 같은 이것
시원하고 텁텁하고 왁자한 이것
어둑한 밤의 노래가 아니라
환한 햇볕 아래 흥이 오르는 이것
반은 양식이고 반은 술이고
반은 회상이고 반은 용기백배이다가
날 저물어 흥얼흥얼 흙으로 스며드는
순하디 순한 이것

 
* 소주 - 최영철 

나는 어느새 이슬처럼 차고 뜨거운 장르에 왔다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 아니라

격정의 시간을 건너온 고요한 이력이 있다

지금 웅덩이 안으로 조금씩 흘러 들어가

차고 뜨거운 것을 감싼다

어디 불같은 바람만으로 되는 것이냐고

함부로 내지른 토악질로 여기까지 오려고

차가운 것을 버리고 뜨거운 것을 버렸다

물방울 하나 남아 속살 환히 비친다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 아니라

불순의 시간을 견딘 폐허 같은 주름이 있다

오래 삭아 쉽게 불그레진 청춘이

남은 저를 다 마셔달라고 기다린다

 

* 술꾼 - 정희성
겨울에도 핫옷 한벌 없이
산동네 사는 막노동꾼 이씨
하루 벌어 하루 먹는다지만
식솔이 없어 홀가분하단다
술에 취해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낯선 사람 만나도 알은체하고
남의 술상 앞에서 입맛 다신다
술 먹을 돈 있으면 옷이나 사 입지
그게 무슨 꼴이냐고 혀를 차면
빨래해줄 사람도 없는 판에
속소캐나 놓으면 그만이지
겉소캐가 다 뭐냐고 웃어넘긴다 *

 
* 벚꽃 핀 술잔 - 함성호 

마셔, 너 같은 년 처음 봐
이년아 치마 좀 내리고, 말끝마다
그렇지 않아요? 라는 말 좀 그만 해
내가 왜 화대 내고 네년 시중을 들어야 하는지
나도 한시름 덜려고 와서는 이게 무슨 봉변이야
미친년
나도 생이 슬퍼서 우는 놈이야
니가 작부ㄴ지 내가 작부ㄴ지
술이나 쳐봐, 아까부터 자꾸 흐드러진 꽃잎만 술잔에 그득해
귀찮아 죽겠어, 입가에 묻은 꽃잎이나 털고 말해
아무 아픔도 없이 우리 그냥 위만 버렸으면
꽃 다 지면 툭툭 털고 일어나게
니는 니가 좀 따라 마셔
잔 비면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지 말고
술보다 독한 게 인생이라고?
뽕짝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술이나 쳐
또 봄이잖니 *

* 신현림시집[당신이라는 시]-마음산책  

 

* 탁주 - 권선희  

제수씨요, 내는 말이시더. 대보 저 짝 끄트머리 골짝 남매 오골오골 부잡시럽던 집 막내요. 우리 큰 시야가
캉 스무 살 차이 나는데요. 한  날은  내를 구룡포, 인자 마보이 거가 장안동쯤 되는 갑디더. 글로  데불고 가가
전 처음으로 짜장면 안 사줬능교. 내 거그 앉아가 거무티티한 국수 나온 거 보고는 마  바로  오바이트 할라 했니더.
희안티더. 그 마이 촌놈이 뭐시 배  타고 스페인꺼정 안 갔능교. 가가 그 노무 나라 음식 죽지 몬해 묵으면서
내 구룡포 동화루 짜장면 생각  마이  했니더. 생각해 보믄 울행님이 내 보고 샐쭉이 웃던  이유 빤한데 내는
그 촌시럽던 때가  우예 이리 그립겠능교. 마 살믄  살수록 자꾸 그리운기라요. 그기 뭐시 첫사랑 고 문디가시나
그리운 것에 비할라요. 내 품은 가시나들 암만 이뻐도  울 행님 그 웃음 맨키야 하겠능교. 뭐시 이리도  급히  살았는지
내도 모르요. 참말로 문디 같은  세월이니더. 제수씨요, 무심한 기 마 세월이니더. 우예든동 한 잔 하시더……
 
* 술 - 문정희 
술이 나를 찾아오지 않아
오늘은 내가 그를 찾아간다


술 한번 텄다 하면 석 달 열흘
세상 곡기 다 끊어버리고
술만 마시다가
검불처럼 떠나가버린 아버지의 딸

오늘은 술병 속에 살고 있는 광마를 타고
악마의 노래를 훔치러 간다

 
그러나 네가 내 가슴에 부은 것은
술이 아니라 불이었던가
벌써 나는 활 활 활화산이다

사방에 까맣게 탄 화산재를 보아라
죽어 넘어진 새와 나무들 사이로
몸서리치며 나는 질주한다


어디를 둘러봐도 혼자뿐인 날
절벽 앞에 술잔을 놓고
나는 악마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댄다
 

으흐흐! 세상이 이토록 쉬울 줄이야 *

* 문정희시집[지금 장미를 따라]-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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