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박규리 시 모음

효림♡ 2009. 12. 18. 09:17

* 치자꽃 설화 - 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 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는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

 

* 천리향 사태

글쎄 웬 아리동동한 냄새가 절집을 진동하여
차마 잠 못들고 뒤척이다가
어젯밤 산행(山行) 온 젊은 여자 둘
대체 그중 누가 나와 내 방 앞을 서성이나
젊은 사미승 참다못해 문을 여니
법당 뒤로 언뜻 검은 머리 숨는 게 아닌가
콩당콩당 뛰는 가슴 허리춤에 잡아내리고
살금살금 법당 뒤로 뒤꿈치 들고 접어드니
바람처럼 돌담 밑으로 스며드는 아,
참을 수 없는.....내.....음.....오호라 거기라고,
거기서 기다린다고 이번에는
헛기침으로 짐짓 기별까지 놓았는데
이 환.장.할.봄날 밤, 버선꽃 가지 뒤로
그예 숨어 사라지다니, 기왕 이렇게 된 걸
피차 마음 다 흘린 걸
밤새 동쪽 종각에서 서쪽 아래 토굴까지
남몰래 돌고 돌다가 저 아래 대밭까지 돌고 돌다가

새벽 도량석 칠 때까지 돌고 돌다가

온 산 다 깨도록 돌고 돌다가

이제 오도가도 못해서 홀로 돌고 돌다가.....

천리향, 천리향이었다니.....눈물 핑 돌아서 *

                 

* 죽 한 사발 
나도
언제쯤이면
다 풀어져
흔적도 없이 흐르고 흐르다가
그대 상처 깊은 그곳까지
온몸으로 스밀
죽, 한 사발 되랴

 

* 저, 앗찔한 잇꽃 좀 보소 
보따리 풀어놓고 어둔 방안에 앉은 당신을 보니 참말로 가슴이 무너져내리네 그동안......어찌......살았는가......다 접어둠세...... 새끼들 두고 도주한 자네 심정 생각하면 그 사연 소설 몇 권 안 되겠나 피차 누굴 원망하겠는가 내 죄 더 큼세 저 꼼지락대는 것들 눈앞에 감감하여 농약병도 깊숙이 넣어둔 지 나도 꽤 오래네 자네 없이 살아보니 말이네만 내 속이 깊지 못했네 축사를 덮는 골판 지붕에도 왜 있잖은가 푹푹 골이 잘 져야 빗물이건 눈물이건 아래로 내려가지 않던가 제 몸의 골도 잘 파여야 하다못해 지나는 바람 한줄기 편히 흘러내리지 않던가 긴말 할 것 없네 몇 년 사이에 골 깊어진 이맛살을 보니 이녁 마음살도 터졌네...... 한잔 더 하려고 들고 온 술인데 잘 되었구만 쭉, 드소! 암말 말고 눈물바람도 치우고, 저 쩍쩍 갈라진 논바닥에 물 스미듯, 맺힌 맘 모진 세월 휘이휘이 가슴팍 아래로 흘려내리소 자, 자 이쪽 툇마루쪽으로 좀 나와보소 아, 눈물에 부대낀 만큼 파이고 낮아 지지 않는 세월 봤는가......저기, 아찔한 연분홍, 잇꽃 부푼 것 좀 보소

 

* 단 한 번 본 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마음이 가겠나
마음이 가지 않는데 무슨 그리움이 파꽃처럼 싹트겠나
파꽃처럼 쓰리고 아픈 향 뭐 때문에 피워 올리겠나
향이 없는데 팔뚝을 타고 혈관에 지져댈 뜨거움 어딨겠나
하아 아픔이 없는데 타고 내릴, 온몸을 타고 내릴 눈물이야
당최 어딨겠나, 동안거 뜨거운 좌복 위에, 내가 없어서 그래도 없는데
이제 와서 싸늘한 비구 이마 위로 울컥울컥 솟구치는 이 신열은
그런데 이 신열은

 

* 산그늘
먼산바라기만 하던 스님도
바람난 강아지며 늙은 산고양이도
달포째 돌아오지 않는다
자기 누울 묏자리밖에 모르는 늙은 보살 따라
죄 없는 돌소나무밭 돌멩이를 일궜다
문득
호미 끝에 찍히는 얼굴들
절집 생활 몇년이면 나도
그만 이 산그늘에 마음 부릴 만도 하건만
속세 떠난 절 있기나 한가
미움도 고이면 맛난 정이 든다더니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하필 그리워져서
눈물 찔끔 떨구는 참 맑은 겨울날 *

 

* 그런 일이 어딨노 경(經)

하늘이 두 쪽 나도 당신은 내 맘 모를 깁니더
땅이 두 번 갈라져도 당신은 내 맘 모를 깁니더
하, 세상이 왕창 두 동강 나도 하마
당신은 내 맘 모를 깁니더
이 가슴 두 쪽을 지금 쫘악 갈라보인다 캐도
참말로 당신은 내 맘 모를 깁니더
........

술 깼나 저녁 묵자

 

* 그 변소간의 비밀 
  십년 넘은 그 절 변소간은 그동안 한번도 똥을 푼 적 없다는데요 통을 만들 때 한 구멍 뚫었을 거라는 등 아예 처음부터 밑이 없었다는 둥 말도 많았습니다 변소간을 지은 아랫말 미장이 영감은 벼락 맞을 소리라고 펄펄 뛰지만요, 하여간 그곳은 이상하게 냄새도 안 나고 볼일 볼 때 그것이 튀어 엉덩이에 묻는 일도 없었지요 어쨌거나 변소간 근처에 오동나무랑 매실나무가 그 절에서 가장 눈에 띄게 싯푸르고요 호박이랑 산수유도 유난히 크고 환한 걸 보면요 분명 뭐가 새긴 새는 것이라고 딱한 우리 스님도 남몰래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요 누가 알겠어요, 저 변소는 이미 제 가장 깊은 곳에 자기를 버릴 구멍을 스스로 찾았는지도요 막막한 어둠 속에서 더 갈 곳 없는 인생은 스스로 길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어서요 한줌 사랑이든 향기 잃은 증오든 한 가지만 오래도록 품고 가슴 썩은 것들은, 남의 손 빌리지 않고도 속에 맺힌 서러움 제 몸으로 걸러서, 세상에 거름 되는 법 알게 되는 것이어서요 십년 넘게 남몰래 풀과 나무와 바람과 어우러진 늙은 변소의 장엄한 마음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만도 하지만요 밤마다 변소가 참말로 오줌 누고 똥 누다가 방귀까지 뀐다고 어린 스님들 앞에서 떠들어대는 저 구미호 같은 보살말고는, 그 누가 또 짐작이나 하겠어요 *

* 소쩍새 우는 봄날에
나에게도 소원이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낮게 드리운 초라한 집 뜰에
평생을 엎드려 담장이 될지언정
스스로 빛나 그대 품에 들지 않고
오직 무너져 흙으로 돌아갈
한 꿈밖엔 없는 돌이 되는 겁니다

구르고 구르다 그대 발 밑을 뒹글다
떠돌다 떠밀리다 그대 그림자에 묻힌들
제아무리 단단해도 금강석이 되지 않고
제아무리 슬퍼도, 그렇지요
울지 않는 돌이 되는 겁니다

이내 몸, 이 폭폭한 마음
소리없이 스러지는 어느날, 그렇게
부서져 고요히 가라앉으면
다시 소쩍새, 다시 소쩍새 우는 봄날에

양지바른 숲길에 부풀어오른
왜 따스한 흙 한줌 되지 않겠습니까
지쳐 잠든 그대 품어안을
눈물겨운 무덤 흙 한줌, 왜 되지 않겠습니까

 

* 홍도화 진다  

홍도화 진다 

꼭대기부터 

솎아내듯 잎 진다

가장 먼저 새순 올렸던 

그 자리부터 잎 진다 

한여름 어지럽게 달뜬 

뜨거운 잎 진다 

너도 떠났다 

차가운 두 팔과 다리

요동치는 가슴만으로

다시 뜨거워지기 위해 

다시 뜨거워지기 위해 

홍도화 진다 

내가 진다 * 

 

* 박규리시집[이 환장할 봄날에]-창비


* 박규리 시인

-1960년 서울 출생

-1995년 민족예술에 [가구를 옮기다가]외 4편을 발표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창비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춘수 시 모음   (0) 2009.12.21
눈(雪) 시 모음  (0) 2009.12.21
권선희 시 모음  (0) 2009.12.16
오탁번 시 모음  (0) 2009.12.16
김종삼 시 모음  (0) 2009.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