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 오탁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 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 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작은 새가 되어
나무가지 위에 내려앉아
해 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 스톱도 급행 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갯짓
지난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變成)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 가는 불씨를 분다 *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민음사
* 사랑 사랑 내 사랑
논배미마다 익어가는 벼이삭이
암놈 등에 업힌
숫메뚜기의
겹눈 속에 아롱진다
배추밭 찾아가던 배추흰나비가
박넝쿨에 살포시 앉아
저녁답에 피어날
박꽃을 흉내낸다
눈썰미 좋은 사랑이여
나도
메뚜기가 되어
그대 등에 업히고 싶다 *
* 봄
겨우내 살이 오른 딱정벌레 작은 알이
봄 아침 눈을 뜨고 나무 밑둥 간질일 때
그리움 가지 끝마다 새잎 나며 보챈다
버들개지 실눈 뜨는 여울목 아지랑이
눈물겨운 물거울로 꿈결 속에 반짝일 때
이제야 견딜 수 없는 꽃망울이 터진다
* 실비
비 내릴 생각 영 않는 게으른 하느님이
소나무 위에서 낮잠을 주무시는 동안
쥐눈이콩만 한 어린 수박이
세로줄 선명하게 앙글앙글 보채고
뙤약볕 감자도 옥수수도
얄랑얄랑 잎사귀를 흔든다
내 마음의 금반지 하나
금빛 솔잎에 이냥 걸어두고
고추씨만 한 그대의 사랑 너무 매워서
낮곁 내내 손톱여물이나 써는 동안
하느님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재채기라도 하셨나
실비 뿌리다가 이내 그친다 *
* 과추풍령유감(過秋風嶺有感)
가까운 山
더 가까이 보이고
먼 山
더 멀리 보인다
참새 똥 뒤집어 쓴
허수아비 하나
수수밭 두렁에서
웃고 있다
아득하기만 한
이 가을날
오직 나 하나
눈물방울 사이로
가까운 山
더 멀리 보이고
먼 山
더 가까이 보인다
* 사랑의 잠
하늘은
지금도 하늘빛 하늘인데
오작교(烏鵲橋)까치 비추던
나의 사랑은
광(光)케이블 다 끊어졌고나
나 이제 그냥
운주사 와불(臥佛) 옆에 나란히 누워
깜깜한 잠에 빠질까 하니
세상의 연인들아
발소리 죽이고 지나가게나
나 이제 그만
한 점 구름 배처럼 타고
저승의 하늘을 저어 갈까 하니
은하계의 뭇 별들아
별빛 아예 비추지 말게나
* 오탁번시집[벙어리장갑]-문학사상사
* 눈부처
정월 대보름날 윷놀이 하다가
눈깜짝이 한 씨가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그만 쓰러졌다
사람들이 놀라 일으키자
ㅡㅡ뭐여? 왜들 이려?
한마디 하고는 다시 쓰러졌다
동 트자마자 일어나
개 혓바닥같이 생긴 괭이를 들고
논꼬 보러 가던
동네에서 제일 바지런한
조쌀한 한 씨는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한 씨 삼우제 날
동네사람들이 모여
경로당에서 소주를 마셨다
가뭇가뭇한 한 씨 얼굴이
술잔 속에
눈부처인 양 언뜻 비쳤다
이승 저승이
입술에 닿는 술잔만큼
너무 가까워서
동네사람들은 함빡 취했다
ㅡㅡ잔 안 비우고 뭐 해유?
한 씨에게 자꾸만 술을 권했다
* 그냥커피
옛날다방에서
그냥커피를 마시는 토요일 오후
산자락 옹긋옹긋한 무덤들이
이승보다 더 포근하다
채반에서 첫잠 든 누에가
두잠 석잠 다 자고
섶에 올라 젖빛 고치를 짓듯
옛날다방에서 그냥커피 마시며
저승의 잠이나 푹 자고 싶다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은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주는 손바닥만큼씩 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나?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 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와 딸아이 앞에는 언제나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 다 예쁘게 몸치장을 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슬이나? 불알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세요?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하는 토요일 오후
모의고사를 열 문제나 틀리고도 행복하기만 한
강남구에서 제일 예쁜 내 딸아 아이구 예쁜 것!
* 토요일 오후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 벙어리 장갑
여름내 어깨순 집어준 목화에서
마디마디 목화꽃이 피어나면
달콤한 목화다래 몰래 따서 먹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ㅡ겨울에 손 꽁꽁 얼어도 좋으니?
서리 내리는 가을이 성큼 오면
다래가 터지며 목화송이가 열리고
목화송이 따다가 씨아에 넣어 앗으면
하얀 목화솜이 소복소복 쌓인다
솜 활끈 튕기면 피어나는 솜으로
고치를 빚어 물레로 실을 잣는다
뱅그르르 도는 물렛살을 만지려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ㅡ손 다쳐서 아야 해도 좋으니?
까치설날 아침에 잣눈이 내리면
우스꽝스런 눈사람 만들어 세우고
까치설빔 다 적시며 눈싸움한다
동무들은 시린 손을 호호 불지만
내 손은 눈곱만큼도 안 시리다
누나가 뜨개질한 벙어리장갑에서
어머니의 꾸중과 누나의 눈흘김이
하얀 목화송이로 여태 피어나고
실 잣는 물레도 이냥 돌아가니까 *
* 두레반
잣눈이 내린 겨울 아침, 쌀을 안치려고 부엌에 들어간 어머니는 불을 지피기 전에 꼭 부지깽이로 아궁이 이맛돌을 톡톡 때린다 그러면 다스운 아궁이 속에서 단잠을 잔 생쥐들이 쪼르르 달려 나와 살강 위로 달아난다
배고픈 까치들이 감나무 가지에 앉아 까치밥을 쪼아 먹는다 이빠진 종지들이 달그락대는 살강에서는 생쥐들이 주걱에 붙은 밥풀을 냠냠 먹는다 햅좁쌀 같은 햇살이 오종종히 비치는 조붓한 우리 집 아침 두레반 *
* 춘일(春日)
풀귀얄로
풀물 바른 듯
안개 낀 봄산 //
오요요 부르면
깡종깡종 뛰는
쌀강아지 //
산마루 안개를
홑이불 시치듯 호는
왕겨빛 햇귀 *
* 저녁연기 같은 것
시는 저녁연기 같은 것이다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마을,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바로 시다.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내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 높이까지만 피어오르다가,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저녁연기, 이게 바로 시다
저녁밥을 먹으려고 두레반 앞에 앉으면, 솔가지 타는 내가 배어 있는 어머니의 흰 소매에서는
아련한 저녁연기가 이냥 피어오른다 *
* 고욤나무
갑사 들어가는 아름드리 숲길에서 문득 만난
키만 싱겁게 큰 비쩍 마른 고욤나무 한 그루
잎사귀도 고욤도 없이 빈 손 하늘까지 펴고
계룡산 깊은 울음소리 염주알처럼 헤아린다
봄 여름 다 보내고 단풍잎 어지러운 하늘에
꿈속에서도 그리운 뺨 눈물 머금은 저녁노을
고욤나무의 적막한 꿈이 가지 끝에 이울고
부처님의 금빛 손가락 목탁소리에 무심하다
* 명사산(鳴砂山)
명사산(鳴砂山) 아득한 모래바람 속에서
긴 잠을 주무시는
혜초 스님을 월아천(月牙泉)으로 모셔다가
서울에서 가져온
마늘쫑 고추장 깻잎 안주 삼아서
곡차 몇 잔 마신다
스님의 잠동무 아주 잘 해온
사막의 계집들도 불러내어
꼭두서니빛 꽃을 피우는
낙타초 가에 앉혀두고
스님한테 옛 사직(社稷)의 흥망을 아뢴다
즈믄 해 동안 잠동무하면서
스님한테 살가운 간지럼 많이나 태운
양젖냄새 나는 위구르 계집과
말젖냄새 나는 흉노 계집이
정말 갸륵해
월아천(月牙泉) 옥빛 물로 옥가락지 만들어
모래울음 보채는 손가락 손가락에
하나씩 끼워준다 *
* 폭설(暴雪)
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ㅡ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렀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ㅡ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天地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宇宙의 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ㅡ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겄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
* 오탁번(吳鐸藩)시인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1967년 중앙일보 [순은이 빛나는 아침에] 당선, 1987년 한국문학작가상, 1994년 동서문학상, 1997년 정지용문학상 수상
-시집 [겨울강][1미터의 사랑][벙어리장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