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김춘수 시 모음

효림♡ 2009. 12. 21. 08:33
*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 애송시 100편 

 

*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

* 김춘수시집[꽃인 듯 눈물인 듯]-예담

 

서풍부(西風賦)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온통 풀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

* 김춘수시집[꽃인 듯 눈물인 듯]-예담

 

* 인동(忍冬)잎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 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잎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
더욱 슬프다 *


* 꽃 1  

그는 웃고 있다. 개인 하늘에 그의 미소는 잔잔한 물살을 이룬다 

그 물살의 무늬 위에 나는 나를 가만히 띄워본다. 그러나 나는 이미 한마리의 황나비는 아니다

물살을 흔들며 바닥으로 나는 가라앉는다. 한나절, 나는 그의 언덕에서 울고 있는데, 도연히 눈을 감고 그는 웃고 있다

 

* 꽃 2
바람도 없는데 꽃이 하나 나무에서 떨어진다. 그것을 주워 손바닥에 얹어 놓고 바라보면 바르르 꽃잎이 훈김에 떤다

화분(花粉)도 난(飛)다. [꽃이여!]라고 내가 부르면 그것은 내 손바닥에서 어디론지 까마득히 떨어져 간다 
지금, 한 나무의 변두리에 뭐라는 이름도 없는 것이 와서 가만히 머문다

 

* 꽃을 위한 서시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되리라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 *

* 신경림-처음처럼

 

꽃의 소묘

1. 꽃이여, 네가 입김으로 
대낮에 불을 밝히면 
환히 금빛으로 열리는 가장자리 
빛깔이며 향기며 
花紛이며...... 나비며 나비며 
축제의 날은 그러나 
먼 추억으로서만 온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2. 사랑의 불 속에서도 
나는 외롭고 슬펐다 

사랑도 없이 
스스로를 불태우고도 
죽지 않는 알몸으로 미소하는 
꽃이여 
눈부신 순금의 阡의 눈이여 
나는 싸늘하게 굳어서 
돌이 되는데

 
3. 네 미소의 가장자리를 
어떤 사랑스런 꿈도 
침범할 수는 없다 

금술 은술을 늘이운 
머리에 칠보화관을 쓰고 
그 아가씨도 
新婦가 되어 울며 떠났다 

꽃이여, 너는 
아가씨들의 肝을 
쪼아먹는다 

 
4. 너의 미소는 마침내 
갈 수 없는 하늘에 
별이 되어 박힌다 

멀고 먼 곳에서 
너는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너를 향하여 나는 
외로움과 슬픔을 
던진다

 
* 분수 
1. 발돋움하는 발돋움하는 너의 자세는
왜 이렇게
두 쪽으로 갈라져서 떨어져야 하는가

그리움으로 하여
왜 너는 이렇게
산산히 부서져서 흩어져야 하는가

2. 모든 것을 바치고도
왜 나중에는
이 찢어지는 아픔만을
가져야 하는가

네가 네 스스로에 보내는
이별의
이 안타까운 눈짓만을 가져야 하는가 

3. 왜 너는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떨어져서 부서진 무수한 네가
왜 이런
선연한 무지개로
다시 솟아야만 하는가 *
* 김춘수시집[꽃인 듯 눈물인 듯]-예담
 
* 달개비꽃
울고 가는 저 기러기는
알리라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
울지 않는 저 콩새는 알리라
누가 보냈을까
한밤에 숨어서 앙금앙금
눈뜨는
 
* 앵오리

우리 고향 통영에서는

잠자리를 앵오리라고 한다

부채를 부치라고 하고 고추를

고치라고 한다

우리 고향 톹영에서는

톹영을 퇴영이라고 한다

팔을 폴이라고 하고 팥을

퐅이라고 한다

우리 고향 통영에서는

멍게를 우렁싱이라고 하고 똥구멍을

미자발이라고 한다

우리 외할머니께서는

통영을 퇴영이라고 하셨고 동경을

딩경이라고 하셨다.그러나

까치는 까치라고 하셨고 까치는

깩 깩 운다고 하셨다.그러나

남망산은

난방산이라고 하셨다

우리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내 또래 외삼촌이

오매 오매 하고 우는 것을 나는 보았다

 
* 시(詩) 1
동체(胴體)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고
한 사나이의 무거운 발자국이 지구(地球)를 밟고 갈 때
허물어진 세계(世界)의 안쪽에서 우는
가을 벌레를 말하라
아니
바다의 순결(純潔)했던 부분을 말하고
베고니아 꽃잎에 듣는
아침 햇살을 말하라
아니
그을음과 굴뚝을 말하고
겨울습기(濕氣)와
한강변(漢江邊)의 두더지를 말하라
동체(胴體)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고
한 사나이의 무거운 발자국이
지구(地球)를 밟고 갈 때
 
* 능금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이미 가 버린 그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물은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놓칠 듯 놓칠 듯 숨 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며는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

 
* 나의 하나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

* 김춘수시집[꽃인 듯 눈물인 듯]-예담

 

* 가을 저녁의 詩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

 

* 부재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
철마다 피곤
소리없이 져 버렸다

차운 한겨울에도
외롭게 햇살은
청석(靑石) 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일없이 세월은 흘러만 가고
꿈결같이 사람들은
살다 죽었다 *

* 김춘수시집[꽃인 듯 눈물인 듯]-예담 

 

* 계단

거기 중간쯤 어디서

귀뚜라미가 실솔이 되는 것을 보았다

부르르 수염이 떨고 있었다

그때가 물론 가을이다

끄트머리 계단 하나가  하늘에 가 있었다

 

* 쥐오줌풀

하느님,

나보다 먼저 가신 하느님,

오늘 해질녘

다시 한 번 눈 떴다 눈 감는

하느님, 

저만치 신발 두짝 가지런히 벗어놓고

어쩌노 멱감은 까치처럼

맨발로 울고 가신

하느님, 그

하느님 * 

 

* 노새를 타고

기러기는 울지마,

기러기는 날면서 끼루룩 끼루룩 울지 마,

바람은 죽어서 마을을 하나 넘고 둘 넘어

가지 마,멀리 멀리 가지 마,

왜 이미 옛날에 그런 말을 했을까.

도요새는 울지 마,

달맞이꽃은 여름밤에만 피지 마,

언뜻언뜻 살아나는 풀무의 불꽃,

풀무의 파란 불꽃. *

 

* 순명(順命)

처서 지나고 땅에서 서늘한 기운이 돌게 되면 고목나무 줄기나

바위의 검붉은 살갗 같은 데에 하늘하늘 허물을 벗어놓고 매미는 어디론가 가 버린다. 

 

가을이 되어 수세미가 누렇게 물들어 가고 있다. 그런 수세미의 허리에 잠자리가 한 마리 붙어 있다.

가서 기척을 해봐도 대꾸가 없다. 멀거니 눈을 뜬 채로다. 날개 한 짝이 사그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내 손이 그의 몸에 닿자 긴 꼬리의 중간쯤이 소리도 없이 무너져 내린다. *

 

* 흔적

망석이 어디 갔나
망석이 없으니 마당이 없다
마당이 없으니 삽사리가 없다
삽사리가 없으니
삽사리가 짖어대면
달이 없다
망석이 어디 갔나 *
* 김춘수시집[거울 속의 천사]-민음사

 

* 김춘수(金春洙)시인

-1922~2004 경남 충무 사람

-1946년 [날개]에 [애가]발표, 1958년 한국시인협회상 1959년 자유문학상-대한민국문학상-예술원상 수상

-시집 [꽃의 소묘][김춘수시선][꽃을 위한 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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