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눈(雪) 시 모음

효림♡ 2009. 12. 21. 08:16

* 첫눈 - 김용택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하나가 시린 허공을 건너와 메마른 내 손등을
적신다 *

 

* 첫눈 - 이정하

아무도 없는 뒤를 자꾸만 쳐다보는 것은
혹시나 네가 거기 서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그러나 너는 아무데도 없었다

낙엽이 질 때쯤 나는 너를 잊고 있었다
색 바랜 사진처럼 까맣게 너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첫눈이 내리는 지금, 소복소복 내리는 눈처럼
너의 생각이 싸아하니 떠오르는 것은 어쩐 일일까
그토록 못 잊어 하다가
거짓말처럼 너를 잊고 있었는데
첫눈이 내린 지금

자꾸만 휑하니 비어 오는 내 마음에
함박눈이 쌓이듯 네가 쌓이고 있었다

 

* 첫눈 - 박남수

그것은 조용한 기도
주검 위에 덮는 순결의 보자기
밤 새워 땅을 침묵으로 덮고
사람의 가슴에, 뛰는 피를
조금씩 바래주고 있다
개구쟁이 바람은 즐거워서 즐거워서
들판을 건너가고 건너오고
눈발은 바람 따라 기울기도 하지만
절대의 침묵은 조용히 조용히
지붕 위에 내리고, 혹은
나뭇가지 위에 내리고
혹은 인류의 가슴에도 내리는가

아침 동이 트면, 세상은
빛나는 흰빛으로, 오예(汚濊)를 씻으라

 

* 눈 - 김종해

눈은 가볍다

서로가 서로를 업고 있기 때문에

내리는 눈은 포근하다

서로의 잔등에 볼을 부비는

눈 내리는 날은 즐겁다

눈이 내릴 동안

나도 누군가를 업고 싶다 * 

 

* 눈 - 김소월

새하얀 흰 눈, 가비얍게 밟을 눈

재 같아서 날릴 듯 꺼질 듯한 눈

바람엔 흩어져도 불길에야 녹을 눈

계집의 마음, 님의 마음 *

 

눈 오는 저녁 - 김소월

바람 자는 이 저녁

흰 눈은 퍼붓는데

무엇하고 계시노

같은 저녁 금년은.....

 

꿈이라도 꾸면은!

잠들면 만날런가

잊었던 그 사람은

흰 눈 타고 오시네  

저녁때, 흰 눈은 퍼부어라 * 

 

눈 - 박용래

하늘과 언덕과 나무를 지우랴

눈이 뿌린다

푸른 젊음과 고요한 흥분이 서린

하루하루 낡아 가는 것 위에

눈이 뿌린다

스쳐 가는 한 점 바람도 없이

송이눈 찬란히 퍼붓는 날은

정말 하늘과 언덕과 나무의

한계는 없다

다만 가난한 마음도 없이 이루어지는

하얀 단층

 

눈 - 윤동주

지난 밤에

눈이 소오복히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눈길 - 문인수

눈 덮인 들판을 가로지르며 길이 묻혀 있다

두더지 자국처럼 꾸불꾸불 한참 가고 있다

동구 밖의 등 굽은 홰나무 밑을 지나면서

까치집 한번 올려다보이고

더 춥다

저무는 길 끝 쇠죽여물 끓는 냄새가 난다 

 

눈 내린 뒤 - 이항복

눈 내린 뒤 산 사립은 늦도록 닫혀 있고

개울물 다리는 한낮에도 오가는 사람 적네

화로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뜨거운 기운들

알 굵은 산밤을 혼자서 구워 먹네 

 

* 눈보라 - 황지우

원효사 처마 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 있게 하고

눈밭을 민 히말라야소나무숲을 삼봉으로 데려가 버린다

눈보라여, 오류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나믹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눈 내리는 마을 - 오탁번 

건너 마을 다듬이 소리가
눈발 사이로 다듬다듬 들려오면
보리밭의 보리는
봄을 꿈꾸고
시렁 위의 씨옥수수도
새앙쥐 같은 아이들도
잠이 든다

꿈나라의 마을에도
눈이 내리고
밤마실 나온 호랑이가
달디단 곶감이 겁이 나서
어흥어흥 헛기침을 하면
눈사람의 한쪽 수염이
툭 떨어져서 숯이 된다

밤새 내린 눈에
고샅길이 막히면
은하수 물빛 어린 까치들이
아침 소식을 전해 주고
다음 빙하기가 만년이나 남은
눈 내리는 마을의 하양 지붕이
먼 은하수까지 비친다 *

 

눈 오는 마을 - 김용택

저녁눈 오는 마을에 들어서 보았느냐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마을이 조용히 그 눈을 다 맞는

눈 오는 마을을 보았느냐

눈과 밭과 이 세상에 난 길이란 길들이

마을에 들어서며 조용히 끝나고

내가 걸어온 길도

뒤돌아 볼 것 없다 하얗게 눕는다

이제 아무 것도 더는 소용없다 돌아설 수 없는 삶이

길 없이 내 앞에 가만히 놓인다

저녁 하늘에 가득 오는 눈이여

가만히 눈발을 헤치고 들여다보면

이 세상엔 보이지 않은 것 하나 없다

다만

하늘에서 살다가 이 세상에 온 눈들이 두 눈을 감으며

조심조심 하얀 발을 이 세상 어두운 지붕 위에

내릴 뿐이다 

 

눈 온 아침 - 신경림

잘 잤느냐고

오늘따라 눈발이 차다고

이 겨울을 어찌 나려느냐고

내년에는 또 

꽃을 피울 거냐고

 

늙은 나무들은 늙은 나무들끼리

버려진 사람들은 버려진 사람들끼리

기침을 하면서 눈을 털면서 *

* 신경림시집[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랜덤하우스
 

* 눈 내리는 길 - 도종환

당신이 없다면 별도 흐린 이 밤을
내 어이 홀로 갑니까
눈보라가 지나가다 멈추고 다시 달려드는 이 길을
당신이 없다면 내 어찌 홀로 갑니까
가야 할 아득히 먼 길 앞에 서서
발끝부터 번져오는 기진한 육신을 끌고
유리알처럼 미끄러운 이 길을 걷다가 지쳐 쓰러져도
당신과 함께라면 이 세상 끝까지 가기로 한
이 길을 함께 가지 않으면 어이 합니까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이 함께 있어서 내가 갑니다
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당신이 그 눈발을 벗겨주어
눈물이 소금이 되어 다시는 얼어붙지 않는 이 길
당신과 함께라면 바람과도 가는 길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혼미하여 뒹굴다가도
머리칼에 붙은 눈싸락만도 못한 것들 툭툭 털어버리고
당신이 항상 함께 있으므로 오늘 이렇게 나도 갑니다
눈보라가 치다가 그치고 다시 퍼붓는 이 길을
당신이 있어서 지금은 홀로도 갑니다 *

 

* 눈 내리는 벌판에서 - 도종환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다

발자국 소리만이 외로운 길을 걸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다

몸보다 더 지치는 마음을 누이고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깊어지고 싶다

둘러보아도 오직 벌판

등을 기대어 더욱 등이 시린 나무 몇그루뿐

이 벌판 같은 도시의 한복판을 지나

창 밖으로 따스한 불빛 새어 가슴에 묻어나는

먼 곳의 그리운 사람 향해 가고 싶다

마음보다 몸이 더 외로운 이런 날

참을 수 없는 기침처럼 터져오르는 이름 부르며

사랑하는 사람 있어 달려가고 싶다

 

* 눈 오는 집의 하루 - 김용택  

아침밥 먹고

또 밥 먹는다

문 열고 마루에 나가

숟가락 들고 서서

눈 위에 눈이 오는 눈을 보다가

방에 들어와

밥 먹는다 *

 

* 눈 오는 날 - 이정하  

눈 오는 날엔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는 게 아니라

마음과 마음끼리 만난다.

그래서 눈 오는 날엔

사람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경우가 많다.


눈 오는 날엔 그래서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다. * 

 

* 함박눈 - 고창식  

높고 높은 저 하늘은

멀고도 먼데

흰 눈을 내리시네

꽃을 피시네

넓고 넓은 이 세상은

아득도 한데

솜이불 내리시네

자릴 펴시네

깊고 깊은 산마을은

고요도 한데

자장갈 부르시네

아길 재시네 * 

 

雪夜 - 김광균
어느 먼ㅡ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워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먼ㅡ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

* 신경림[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글로세움

 

* 설일(雪日) - 김남조

겨울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

* 김남조시인[김남조 시 99선]-선

 

* 눈 - 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 김수영시선[거대한 뿌리]-민음사

 

* 눈이 내리느니 - 김동환  

북국에는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느니
회색 하늘 속으로 흰 눈이 퍼부을 때마다
눈 속에 파묻히는 하얀 북조선이 보이느니

가끔 가다가 당나귀 울리는 눈보라가
막북강(漠北江) 건너로 굵은 모래를 쥐어다가
추위에 얼어 떠는 백의인(白衣人)의 귓불을 때리느니

춥길래 멀리서 오신 손님을
부득이 만류도 못하느니
봄이라고 개나리꽃 보려 온 손님을
눈 발귀에 실어 곱게 남국에 돌려 보내느니

백웅(白熊)이 울고 북랑성(北狼星)이 눈 깜박일 때마다
제비 가는 곳 그리워하는 우리네는
서로 부둥켜 안고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 얼음 벌에서 춤추느니

 

모닥불에 비치는 이방인의 새파란 눈알을 보면서
북국은 추워라. 이 추운 밤에도
강녘에는 밀수입(密輸入) 마차의 지나는 소리 들리느니
얼음장 트는 소리에 쇠방울 소리 잠겨지면서

오호, 흰 눈이 내리느니  보오얀 흰 눈이
북새(北塞)로 가는 이사꾼 짐짝 위에
말없이 함박눈이 잘도 내리느니 *

 

* 눈 내릴 때면 - 김지하

이리 눈 내릴 때면
여기면 여기고 저기면 저기지요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렇게 안 부를 도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당신 당신이지요
너 이제 동백 함께 삽니다
나 이제 사철 함께 삽니다
내일 내 소식 들으세요 * 

 

* 눈 내리는 밤 숲가에 멈춰 서서 - 로버트 프로스트 
이게 누구의 숲인지 나는 알 것도 같다.
하기야 그의 집은 마을에 있지만-
눈 덮인 그의 숲을 보느라고
내가 여기 멈춰 서 있는 걸 그는 모를 것이다.
내 조랑말은 농가 하나 안 보이는 곳에
일년 중 가장 어두운 밤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이렇게 멈춰 서 있는 걸 이상히 여길 것이다.
무슨 착오라도 일으킨 게 아니냐는 듯
말은 목방울을 흔들어 본다.

방울 소리 외에는 솔솔 부는 바람과
솜처럼 부드럽게 눈 내리는 소리뿐.
숲은 어둡고 깊고 아름답다.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잠자기 전에 몇십 리를 더 가야 한다.
잠자기 전에 몇십 리를 더 가야 한다 *

- 정현종역 

 

* 폭설 - 석여공  

가끔씩은 저렇게

성난 눈발이었으면 좋겠다

미친 듯이 울다가도

잠깐 햇빛에 흰 이빨처럼

차갑게 반짝이며 웃어 봤으면

좋겠다 가끔씩은 저렇게

겨울 풀꽃이며 사람들의 집

어둔 곳의 캄캄함

우리들의 등 시린 사랑까지도

아주 덮어버렸으면 좋겠다

잠에서 풀린 산기슭 짐승처럼

톡톡 얼음장 깨며

겨울 가뭄 속의

저 지독한 보리 싹처럼 씩씩하게

살아날 것만 살아나고

돋아날 것만 돋아나는

그런 시작이었으면 좋겠다 *

* 석여공시집[잘 되었다]-문학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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