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정호승 동시 모음

효림♡ 2010. 4. 8. 08:40

* 민들레 - 정호승  

민들레는 왜

보도블록 틈 사이에 끼여

피어날 때가 많을까

 

나는 왜

아파트 뒷길

보도블록에 쭈그리고 앉아

우는 날이 많을까 *

 

* 상처

비오는 날에는

빗방울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눈오는 날에는

눈송이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눈비 그치면

햇살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

 

* 기린

기린은

욕심이

좀 많은가 봐

목에

꽃다발을

많이 걸려고

저렇게

목이 긴거야 *

 

* 씨앗  

엄마가 날 낳기 전

나는 무엇이었을까

오월의 나뭇잎에 어리는 햇살이었을까
길가에 핀 한 송이 작은 풀꽃이었을까
아니면 남해의 어느 섬 절벽 위에 둥지 튼
바다새의 작은 새알이었을까

아마 엄마가 날 낳기 전

나는 엄마의 사랑의 마음이었을 거야

마음의 중심에 있는

작은 씨앗이었을 거야 *

 

꽃을 보려고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고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립니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고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립니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엄마를 만나려고

내가 먼저 들에 나가 봄이 됩니다 *

 

* 난초

난초에 꽃이 피지 않는다고
아버지는 불만이시다
하루는 나더러
물을 안 주고 학대하면
꽃이 핀다고
이제 난초에 물을 그만 주라고 하신다
그래도 나는

난초에 물을 자꾸 주었다
아버지 몰래 *

 

* 봄기차

봄날에 서울에서
여수행 기차를 타면
여수역에 도착했는데도 기차가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바다를 향해 달린다
객실마다 승객들이 환하게
동백꽃으로 피어나
여수항을 지나
오동도를 지나
수평선 위로 신나게 달린다 *

 

* 별

가을입니다
떡갈나무 한 그루 바람에 흔들리다가
도토리 한 알 떨어져 또르르 굴러가다가
그만 지구 밖까지 굴러가
별이 됩니다 *

 

* 겨울 저녁

나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엄마는 큰 가마솥에 깨를 볶으신다
아버지 송아지 판 돈 어디서 잃어버리고
몇 날 며칠 술 드신 이야기 또 하신다
한 번만 더 들으면 백 번도 더 듣는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에
부지깽이 끝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겨울 저녁 *

 

* 붕어빵

눈이 내린다
배가 고프다
할머니 집은 아직 멀었다
동생한테 붕어빵 한 봉지를 사주었다
동생이 빵은 먹고
붕어는 어항에 키우자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

 

* 봄날

봄날에 혼자 집을 지키다가
엄마 아빠 결혼식 사진을 들여다본다
사진 위로 키 작은 개미 한 마리 기어가고
엄마 아빠는 간지럼을 타며
팔짱을 끼고 서 있다
나는 슬쩍 팔짱을 풀고
그들 한가운데로 비집고 들어가 본다
신랑 신부가 내 손을 잡는다
따스하다
창밖에 햇살이 눈부시다 *

 

* 꾸중

엄마를 따라 산길을 가다가
무심코 솔잎을 한움큼 뽑아 길에 뿌렸다 
그러자 엄마가 갑자기 화난 목소리로
호승아 하고 나를 부르더니
내 머리카락을 힘껏 잡아당겼다 
니는 누가 니 머리카락을 갑자기 뽑으면 안 아프겠나
말은 못 하지만 이 소나무가 얼마나 아프겠노
앞으로는 이런 나무들도 니 몸 아끼듯이 해라
예, 알았심더
나는 난생처음 엄마한테 꾸중을 듣고

눈물이 글썽했다 *

 

*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

 

* 불일폭포  

폭포에 나를 던집니다

내가 물방울이 되어 부서집니다

폭포에 나를 던집니다

갑자기 물소리가 그치고

무지개가 어립니다

무지개 위에

소년부처님 홀로 앉아

웃으십니다 *

 

* 정호승 -어른이 읽는 동시집[풀잎에도 상처가 있다]-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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