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 - 김용택
하루 해가 떠서
다 지도록
천번 만번이나
당신을 떠났어도
도로 그 자리
나는 하루종일
당신 곁에 꼼짝없이
서 있었습니다 *
* 산도 물도
당신 앞에 서면
산도 물도 꽃도
지워집니다
* 산 하나
저 고운 단풍 보고 있으면
그냥 당신이 그립고 좋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는 이 삶의 청정함과 애련함을
보듬어 안아다가
언제라도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어요
흩어지고 사라질 내 시간들이
당신 생각으로
저 산 단풍처럼
화려하게 살아오르고
고운 산 하나
내 눈 아래 들어섭니다
당신
당신만 생각하면
그냥 당신이 그립고
한없이 세상이 좋아집니다 *
* 밤 산
산들이 저렇게 잠 안 자고
어디를 보며 앉아 있었구나
산들이 저렇게 어둠 속에
잠 안 자고 앉아 어디를 보며
나처럼 속으로 울고 있었구나 *
* 먼 산
그대에게
나는 지금 먼 산입니다
산도 꽃 피고 잎 피는
산이 아니라
산국 피고 단풍 물든 산이 아니라
그냥 먼 산입니다
꽃 피는지
단풍 지는지
당신은 잘 모르는
그냥 나는 그대를 향한
그리운 먼 산입니다 *
* 앞산을 보며
이렇게 살다가
나도 죽으리
나 죽으면
저 물처럼 흐르지 않고
저 산에 기대리
눈을 감고 별을 보며
풀잎들을 키우다가
언젠가는 기댐도
흔적도 없이 지워져서
저 산이 되리 *
* 큰 산
나날이 푸르러오던
지난 여름처럼
이 가을은
날마다 붉어져갑니다
저 산천은
젊음도 뜨겁더니
끝까지 화려합니다
나도 당신에게 가서 저렇게
황홀하게 물들고 싶어요
소리 없는 사랑으로
소리 없는 몸짓으로 저렇게
붉고 뜨거운 큰 산으로
그대 앞에서
눈부시게 물들며 그려지고 싶어요 *
* 산
강물을 따라 걸을 때 강물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흐르는거야
너도 나처럼 흘러봐
하얗게 피어 있는 억새 곁을 지날 때 억새는 이렇게 말했네
너도 나처럼 이렇게 흔들려봐
인생은 이렇게 흔들리는 거야
연보라색 구절초 곁을 지날 때 구절초꽃은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한번 피었다가 지는 꽃이야
너도 나처럼 이렇게 꽃 피워봐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지날 때 느티나무는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그 자리에서 사는 거야
너도 나처럼 뿌리를 내려봐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아래를 지날 때 구름은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별게 아니야 이렇게 허공을 떠도는 거야
너도 이렇게 정처 없이 떠돌아봐
내 평생 산 곁을 지나다녔다네
산은 말이 없네
산은 지금까지 내게 한마디 말이 없었네 *
* 김용택시집[그래서 당신]-문학동네
*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
* 저 산 저 물
산도 한 30년쯤 바라보아야 산이다
물도 한 30년쯤 바라보아야 물이다
내가 누우면 산도 따라 나처럼 눕고
내가 걸어가면 물도 나처럼 흐른다
내가 잠이 들면 산도 자고
내가 깨어나면 물도 깨어난다
내가
세상이 적막해서 울면
저 산 저 물도 괴로워서 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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